미국 독립선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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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2월,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끝나면서 영국왕 [[조지 3세]]와 영국 의회는 ‘[[인지세법]]’([[1765년]]), ‘[[타운젠드법]]’([[1767년]])과 같은 식민지 미국에 대한 과세와 지배를 강화했다. 본국 정부에 의한 식민지 압박정책은 점차 식민지 사람들에게 불만과 반발을 초래하여 민심이반이 일어난다.
 
각각 독자적인 발전을 추진했던 [[13개 식민지]]는 [[1772년]] 11월 연락 조직으로 교신위원회를 발족시킨다. 이 위원회는 [[1774년]] 9월 [[제1차 대륙회의]]([[조지아 식민지]] 제외한 12개 식민지 대표 모임)로 발전하고 본국 정부와의 화해를 도모했다. 그러나 이듬해 [[1775년]] 4월, [[렉싱턴 콩코드 전투]]에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사이에 교전이 일어나게 되고, [[미국 독립 전쟁]]의 포문이 열렸다. [[1775년]] [[5월 10일]], [[제2차 대륙회의]]가 열렸다 (13개 식민걍느금마다 이씨발아지식민지 대표가 모인) 이때까지의 무력 충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본국 정부와의 화해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세는 날로 악화되었고, [[1776년]] 1월 독립을 주장하는 [[토마스 페인]]의 저서 《상식》(''Common Sense'')이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식민지 주민과 식민지 대표들 사이에서도 독립론은 최고조에 달했다.
 
1775년 [[제2차 대륙 회의]]에서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제2대 대통령),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 [[토마스 제퍼슨]]( 제3대 대통령)의 다섯 사람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 작업을 수행했다.<ref>윤용희, 윤이화, "미국의 건국정신과 헌법정신의 함의" 사회과학 Vol.17. 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2005, 13면</ref> 1775년 제2차 대륙 회의 부터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지적 리더십의 집단적 행동으로서의 독립선언서는 미국과 유럽의 수십년 간에 걸친 정치적·철학적 논쟁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제퍼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와 로마 사상가들의 작품을 그 시대의 원전으로 해독하고 인용할 수 있을 만큼 고전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새로운 사상에도 해박한 사람들이었다.<ref>{{서적 인용|저자=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제목=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연도= 2006|출판사= (사)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위치= 서울|id= {{ISBN|89-20-92226-8}}|쪽=105}}</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