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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수는 친일 행적이 없는 인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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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5월]]부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를 놓고 김구와 갈등관계에 있었다. [[12월 2일]] [[서울]] 제기동 자택을 방문한 [[배희범]], [[박광옥]] 등의 총격을 받고 병원으로 입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이때 붙잡힌 배희범, 박광옥 등과 그들의 배후로 지목된 [[김석황]]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고, 김석황은 한독당 중앙위원이자 국민회의 동원부장, 임시정부 등에도 관여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한국민주당]])은 빠졌는데 우익정당 통합의 일환으로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의 통합 시도에 [[김성수 (1891년)|김성수]]는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반대하였다. 통합하는 것은 당을 통째로 임시정부에 갖다 바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ref name="아아아앙">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6쪽.</ref><ref name="ReferenceA">박태균,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해방정국과 4인의 요인 암살, 배경과 진상》(지성사, 1994) 123~124쪽.</ref>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를 놓고도 김구와 언쟁하는 등 김구와 갈등관계에 있었고 이는 김구가 미군정청 법정에 출두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ref name="아아아앙" /> [[조병옥]]은 '유능한 정치가 한 사람이 또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즉 설산 장덕수 형의 불의의 흉사는 한국민주당만의 비통지사가 아니라 건국 과정에 있는 한민족 전체의 애통지사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다<ref name="chose173"/>'며 이어 [[조병옥]]은 자신이 미군정의 경무부장으로 있으면서 '대소사건에 관하여 장덕수 형과 상의하고 태개책을타개책을 강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ref name="chose173"/>'며 아쉬워했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53세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