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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천총(天聰) 9년(1635년) 10월 경인일에 유지(諭旨)하여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원래 만주와 합달 및 [[우라|오라]]와 [[예허|엽혁]] 및 휘발 등의 이름이 있었다. 이전에는 무지한 자들이, 왕왕 제신(諸申)이라 칭하였다. 대저 제신(諸申)의 호는 곧 석북(席北)의 초묵이근(超墨爾根)의 자손이니, 실로 우리 나라와 더불어 관계가 없다. 우리 나라는 만주(滿洲)라는 국호를 만들어, 한 갈래로 이어온 계통의 이어져 내려온 시간이 오래되었고, 혁세(奕世)에 대대로 서로 전하였다. 이제부터 이후, 일체 사람들은, 우리 나라의 원래 명칭인 만주라 칭해야 할 것이며, 거듭 전의 망칭을 얻지 못하게 할지어다."}}
 
[[숭덕제]]가 밝힌 개칭의 이유는 의도적으로 왜곡된 것이고, 그 외에 다른 이유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그의 진짜 이유를의도는 추정의밝혀진 영역에서것이 찾아야한다없다. 일반적으로 주션이라는 용어의 이미가 변했기 때문에 이 명칭을 계속 족명으로 사용하기 어려웠다는 주장인데주장이 있는데, 본래 주션은 사회의 상류 계층인 '이르건({{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ᡳᡵᡤᡝᠨ}}|Irgen}})'과 노예인 '아하({{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ᠠᡥᠠ}}|Aha}})'의 중간에 있는 일반 [[인민]]을 가르키는 용어이기도 했고, 누르가치의 정복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포로가 된 수많은 일반 백성인 '주션'이 노예화되면서 주션이라는 의미가 담기게 되었으며, 따라서 만주로 족명을 개칭했다고 한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year=2018|page=155}}</ref>
 
하지만, [[숭덕제]]가 [[여진족]], [[몽골족]], [[한족]]이 공존하는 새로운 국가 모델을 필요로 하면서, 동시에 통일 전 다양하게 존재했전 여진을 융합시켜야 하는 이중의 고민을 맞게된 상황을 고려하면, [[숭덕제]]는 주션이라는 명칭을 폐기함으로써 그 이름에 묻어있는 과거의 상쟁의 기억, 특히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상쟁의 기억을 일소하고, 만주만을 사용함으로써 여진을 새로운 이름 이래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의도였다는 학설도 있고<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year=2018|page=155~156}}</ref>, 일찍이 [[말갈]] 시대부터 관직 또는 족장의 칭호로서의 요소가 있었던 [[만주]]에서 유래한 [[이만주]]의 이름은 건주연맹의 적법한 족장으로서 그의 지위를 보여주는 작위였는데, 누르가치의 조상들이 1400년대에 이만주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후에, [[명나라]]가 만주라는 작위를 전체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인했고 이후에, [[숭덕제]]의 정책에 의해 법제화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학설도 있으며, 말갈 시대부터 족장을 가르키는 고대의 용어와 약간의 어원적 연관성이 있었던 만주를 국가 내의 지배민족 규정을 위해 차용했다는 학설도 있다.<ref name="Crossley">{{서적 인용|author=Pemela Kyle Crossley|authorlink=|title=The Manchus|series=Peoples of Asia Book 3|publisher=Wiley-Blackwell|isbn=978-0631235910|year=1997}}</ref>
 
새로 만들어진 만주는 과거의 주션이 이름만을 달리 한 것이 아니었다. 만주는 팔기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그에 소속된 주션, 즉 [[건주여진]]과 [[해서여진]] 그리고 [[야인여진|동해여진]]의 일부를 가리켰다. 따라서 팔기에 속하지 않은 동해여진의 다수는 여진의 일부였지만 만주족에서 자연스럽게 제외되었다. 다시 말해서 만주는 과거의 여진과 범주가 달라진, 팔기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민족공동체였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year=2018|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56}}</ref> 만주는 과거의 여진과 범주만이 아니라 속성도 달라졌다. 만주의 업종은 채집, [[수렵]], [[유목]], [[임업]] 등에서 전업 군인으로 변화했다. 만주는 과거의 여진처럼 문화적으로 복합적이지 않았고, 국가가 선포한 기준, 즉 [[혈통]], 팔기에 대한 의무 등에 의해 정체성이 규정되었다.<ref>Pemela Kyle Crossely, A translucrnt mirror: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i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194쪽</ref>
 
[[파일:王敏彤.jpg|섬네일|왕얀 퉁기]]
만주족은 [[팔기]]를 기반으로 하는 민족공동체였기 때문에, 팔기에 새로 편입되는 병력이 생기면 만주의 범위도 확장되었다. 만주팔기에 편입되는 자격이 반드시 과거의 여진인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숭덕제]]는 1634년부터 1640년까지 [[흑룡강]] 유역의 광대한 지역을 원정했고, 투항시킨 소론(索倫,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ᠰᠣᠯᠣᠨ}}|Solon}})<ref>牛素嫻(2006), 清初的「索倫」諸部 ''소론(索倫,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ᠰᠣᠯᠣᠨ}}|Solon}})은 [[산]]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솔론어|소론어]]를 사용하는 [[에벤키|어웡키족]]의 한 갈래로 어웡키족, [[다우르족]], [[오로촌족]]의 총칭이기도 했다.''</ref>, [[에벤키족|어웡키]], [[오로촌족|오로촌]], [[다우르족|다구르]]와 [[야인여진|동해여진]]의 일부를 만주팔기의 일부로 편제했다. 즉 여진과 함께 북방퉁구스북방 퉁구스 계통의 이민족이 만주로 편입된 것이다. 이 때 팔기에 편입된 이들은 “새로운 만주”라는 의미로 '''신만주'''(新滿洲,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ᡳᠴᡝ<br />ᠮᠠᠨᠵᡠ}}|Ice Manju}})라고 불렸다. 이들 신만주를 제외한 본래의 만주는 자연스럽게 '''구만주'''(舊滿洲,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ᡶᡝ<br />ᠮᠠᠨᠵᡠ}}|Fe Manju}})로 불리게 되었다. 만주의 외연 확장은 이후에도 일어났다. [[명나라]]를 점령하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1644년]] 이후 전투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병력의 충원이 잦았고, [[청 제국]]은 필요한 병력을 자신들의 고토인 [[만주]]지역에서 찾았다. [[강희]] 시기인 [[1671년]]부터 [[1677년]]까지 수 차례에 걸쳐 만주지역에서 1만명 이상의 [[나나이족|허저]]와 쿠야라(庫雅喇,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ᡴᡴᡡᡟᠠᡵᠠ}}|Kūyara}})<ref>萬侖, 1987, 淸代庫雅喇滿洲硏究 民族硏究 , 96~97쪽, ''쿠르카(庫爾喀,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ᡴᡡᡵᡴ᠋ᠠ}}|Kūrka}})와 쿠야라(庫雅喇, 庫雅拉, 苦雅拉,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ᡴᡴᡡᡟᠠᡵᠠ|Kūyara}})는 같은 부족을 가르키는 다른 이름이며, 이들은 원말명초 골간올적합(骨看兀狄哈)의 후예로 청대에 [[훈춘]]으로 이주한 뒤, 팔기에 편입되어 '쿠야라 만주'로 불리었다.''</ref><ref>增井寬也, 1989, クルカKūrkaとクヤラKūyala-淸代琿春地方の少數民族 立命館文學 514쪽, ''쿠르카와 쿠야라는 다른 부족인데, 쿠르카는 [[숭덕]] 연간에 얀추 지방(炎楮地方)에 거주하다가 순치연간에순치 연간에 훈춘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가르키는 반면, 쿠야라는 얀추와 혼춘 지방에서 멀리 우수리강우수리 강 상류에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르켰다지칭했다. [[강희]] 10년에 이르러 쿠르카는 대부분 혼춘을 떠났고, 대신 우수리강 유역의 쿠야라가 [[길림]] [[우라]]의 주방 팔기에 편입되어 '쿠야라 만주'로 분류되어 훈춘에 배치되었다. 훈춘의 쿠야라 만주가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명칭대로 쿠르카라고도 불리면서 쿠르카와 쿠야라가 같은 부족으로 여겨졌지만,실제로 많은 쿠야라 중에 훈춘에 거주하는 쿠야라만이 쿠르카라고 불린 것이다.''</ref> 성인남성을 팔기로 편입시켰고<ref>劉小萌, 「關於淸代“新滿洲”的幾個問題」, 『滿族研究』, 1987年 第3期.</ref><ref name="LH6">{{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57}}</ref>, [[1714년]]에는 삼강 유역의 허저족을 삼성협령어문을 설치하면서 팔기에 편입되었다고 한다.<ref>한중관계연구소(2017) , 「아무르강의 어렵민, 허저족」, 『청아출판사』 2장(『허저족의 기원과 역사』), 59쪽</ref> 또한, [[흑룡강]] 유역에서 포로로 잡은 러시아인도 팔기 만주로 편입되었으며,<ref>{{서적 인용|author=구범진|authorlink=|title=청나라, 키메라의 제국|series=서울대 인문 강의|publisher=민음사|isbn=9788937484940|page=216}}</ref> [[건륭]] 연간의 팔기한군 출기 정책을 통틀어 한군 기인의 규모가 약 60% 감소하였을 것으로 추산되고, 그 중 절반은 출기 강제 정책의 영향으로 판단된다.<ref>{{학위논문 인용|author= 황해윤|date= 2015 |title= 乾隆年間의 八旗漢軍 出旗 정책과 그 영향 |url= http://hdl.handle.net/10371/132054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page= ii~iii}}</ref> 더불어 [[위구르]] [[무슬림]]과 티베트인으로 구성된 니루가 새로 조직되어 만주팔기로 편입되었다.<ref>{{서적 인용|author=구범진|authorlink=|title=청나라, 키메라의 제국|series=서울대 인문 강의|publisher=민음사|isbn=9788937484940|page=216쪽}}</ref> 이처럼 만주족은 필요에 따라 융통성있게 외연을 확장해갔다.<ref name="LH6"/>
 
청 제국의 팔기는 단지 만주로만 구성되었던 것이 아니라, 팔기만주, 팔기몽골, 팔기한군 등 세 가지 하위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좁은 의미의 만주족이란 대체로 팔기만주만을 가리키지만, 18세기 말 이후가 되면 만주족이란 곧 팔기만주, 팔기몽골, 팔기한군 등을 모두 포함하는 기인에 대한 통칭이 되었다. 20세기 초 기족(旗族)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기도 하였다.<ref>{{서적 인용|author=구범진|authorlink=|title=청나라, 키메라의 제국|series=서울대 인문 강의|publisher=민음사|isbn=9788937484940|page=107~108}}</ref>
 
대내외적으로 체제에 대한 위협 요소가 산재하던 청 제국 말기, 만주족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주 중심 입헌군주제와 의회 중심 입헌군주제 중 중국의 현실에 적합한 입헌체제의 구성을 도모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주족 지식인 및 관료, 만주친귀(滿洲親貴) 집단이 각기 의견을 개진한 결과 군주 중심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결정하였다. 이에 만주족 지식인들은 단체 결성 및 여론 형성을 통해 자구책 마련 및 [[근대화]]를 역설하며 입헌체제에 걸맞는 ‘공민(公民)’으로의 변화를 추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쑨원]]의 혁명세력에 자발적으로 동참했다.
[[파일:王敏彤.jpg|섬네일|왕얀 퉁기]]
 
대내외적으로 체제에 대한 위협 요소가 산재하던 청 제국 말기, 만주족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주 중심 입헌군주제와 의회 중심 입헌군주제 중 중국의 현실에 적합한 입헌체제의 구성을 도모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주족 지식인 및 관료, 만주친귀(滿洲親貴) 집단이 각기 의견을 개진한 결과 군주 중심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결정하였다. 이에 만주족 지식인들은 단체 결성 및 여론 형성을 통해 자구책 마련 및 [[근대화]]를 역설하며 입헌체제에 걸맞는 ‘공민(公民)’으로의 변화를 추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쑨원]]의 혁명세력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청 제국로부터의 독립과 새로운 정치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신해혁명 이후 공화국 체제로 중국의 국체가 변혁되면서, 만주족은 '공화국 국민’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신해혁명]]은 기존 집권 세력을 말살하는 폭력적 왕조교체가 아닌 정치체제의 비폭력적 근대화 과정이었으며, 이는 혁명세력과 만주족의 타협으로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지배층으로의 경험 위치 역량을 어느 정도 보전할 수 있었던 만주족은 각종 단체를 결성하여 자신들의 활로를 주체적으로 개척하고자 하였다. 황실 종친들은 종사당(宗社黨)을 중심으로 청 제국의 부활과 입헌군주제의 실시를 내세우며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독자세력화를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실질적인 근거지의 부재와 일본 외교정책의 변화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공화정체에 순응하고자 하는 만주족은 만족동진회(滿族同進會)를 중심으로 [[북양정부]]의 정책에 대응하여, 만주족의 정치적 지위 보장과 생계문제 해소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기지몰수(旗地沒收) 정책을 위시한 북양정부의 만주족 약화정책과 만주족의 정치권력화 실패로 인해 만주족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은 점차적으로 축소되어갔다.<ref name="JSR">{{학위논문 인용|author=정세련|date= 2014 |title=中國 國體變革期 滿洲族 團體의 政治活動, 1901-1924 |url= http://s-space.snu.ac.kr/bitstream/10371/127713/1/000000018719.pdf|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page= 54~59}}</ref>
 
국민당 정권 수립 이후 만주족에 대한 의도적 방기(放棄) 정책이 지속되어 공화국 체제로의 순응을 목표하던 만주족 단체의 활동 역시 위축되었다. 그러나 만주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만주족들은 팔기련의회(八旗聯誼會)로 불리는 소형 집회방식을 통해 꾸준히 자신들의 권익활동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공산당에 가담하여 [[몽골]], [[장족]]과 같은 소수민족으로서의 지위 확보 및 국민당 정권에 대한 투쟁에 나섰다. 그 결과 1945년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으로부터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받게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ref name="JSR"/>
 
[[파일:Manchu Soldiers.jpg|섬네일|250px|청말 만주족 무인들.]]
 
신해혁명 이후 공화국 체제로 중국의 국체가 변혁되면서, 만주족은 '[[중화민국|공화국]] 국민’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신해혁명]]은 정치체제의 비폭력적 근대화 과정이었으며, 이는 혁명세력
만주족은 인류사에서 극히 드문 위업을 이룩했다. 중국을 정복해서 중원왕조의 외피까지 입은 만주족은 [[티벳]]·[[신강]]·[[몽골]]까지 지배 영역을 확장했다. 만주족이 획득한 강역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창안한 통치기술은 현대 [[중국]]에 계승되었다. 이런 성취와 유산에도 불구하고 만주족은 역사에서 평가절하되어 왔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year=2018|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57~158}}</ref>
대내외적으로 체제에 대한 위협 요소가 산재하던 청 제국 말기, 만주족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주 중심 입헌군주제와 의회 중심 입헌군주제 중 중국의 현실에 적합한 입헌체제의 구성을 도모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주족 지식인 및 관료, 만주친귀(滿洲親貴) 집단이 각기 의견을 개진한 결과 군주 중심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결정하였다. 이에 만주족 지식인들은 단체 결성 및 여론 형성을 통해 자구책 마련 및 [[근대화]]를 역설하며 입헌체제에 걸맞는 ‘공민(公民)’으로의 변화를 추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쑨원]]의 혁명세력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청 제국로부터의 독립과 새로운 정치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신해혁명 이후 공화국 체제로 중국의 국체가 변혁되면서, 만주족은 '공화국 국민’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신해혁명]]은 기존 집권 세력을 말살하는 폭력적 왕조교체가 아닌 정치체제의 비폭력적 근대화 과정이었으며, 이는 혁명세력과 만주족의 타협으로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지배층으로의 경험 위치 역량을 어느 정도 보전할 수 있었던 만주족은 각종 단체를 결성하여 자신들의 활로를 주체적으로 개척하고자 하였다. 황실 종친들은 [[종사당]](宗社黨)을 중심으로 청 제국의 부활과 입헌군주제의 실시를 내세우며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독자세력화를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실질적인 근거지의 부재와 일본 외교정책의 변화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공화정체에 순응하고자 하는 만주족은 만족동진회(滿族同進會)를 중심으로 [[북양정부]]의 정책에 대응하여, 만주족의 정치적 지위 보장과 생계문제 해소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기지몰수(旗地沒收) 정책을 위시한 북양정부의 만주족 약화정책과 만주족의 정치권력화 실패로 인해 만주족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은 점차적으로 축소되어갔다.<ref name="JSR">{{학위논문 인용|author=정세련|date= 2014 |title=中國 國體變革期 滿洲族 團體의 政治活動, 1901-1924 |url= http://s-space.snu.ac.kr/bitstream/10371/127713/1/000000018719.pdf|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page= 54~59}}</ref>
 
국민당 정권 수립 이후 만주족에 대한 의도적 방기(放棄) 정책이 지속되어 공화국 체제로의 순응을 목표하던 만주족 단체의 활동 역시 위축되었다. 그러나 만주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만주족들은 팔기련의회(八旗聯誼會)로 불리는 소형 집회방식을 통해 꾸준히 자신들의 권익활동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공산당에 가담하여 [[몽골]], [[장족]]과 같은 소수민족으로서의 지위 확보 및 국민당 정권에 대한 투쟁에 나섰다. 그 결과 1945년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으로부터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받게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ref name="JSR"/>
많은 사람들은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한족과 우월한 중국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한족에 흡수되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만주족은 청대에 자신들의 [[언어]]와 생활양식의 많은 부분을 상실해갔지만, 한인과의 경계를 허물어뜨리지 않았고 만주족이라는 자의식과 정체성을 잃지도 않았다. 팔기에 속했던 기인의 후손들인<ref>{{서적 인용|author=구범진|authorlink=|title=청나라, 키메라의 제국|series=서울대 인문 강의|publisher=민음사|isbn=9788937484940|page=108}}</ref> 현재 만주족은 중국에서 '''만족(滿族)'''이라는 민족명으로 여전히 존속하고 있으며, 그 인구는 천만명을 상회한다. 근래 이들은 각종 단체와 [[협회]]를 조직해서 만주족 [[문화]]의 유지와 부활을 도모하고 있다. ‘만주’가 지나간 과거의 주인공만이 아닌 ‘만족’의 전신으로서 오늘에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의 주인으로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이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year=2018|page=158}}</ref>
 
== 종족성 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