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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당시 홍 타이지가 제위에 올랐다고 선포하면서 들이민 근거 중 하나는 10년 전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정복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행사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은 홍 타이지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거부했다. 홍 타이지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ref>[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9022142831#Redyho 병자호란 미스터리…전쟁을 끝낸 건 천연두였다?]</ref> 홍 타이지는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홍 타이지는 조선의 사신들의 소동으로 인해 인해 '미완'에 그쳤던 자신의 '황제 즉위식'을 정축년 정월 30일 [[삼전도]]에서 '완성'하고자 하였다. 그는 조선의 사신이 아니라 국왕인 [[인조]]를 출성시켜 의례의 현장에서 자신과 직접 대면하게 함으로써, 묵던의 '황제 즉위식'보다 더 완성도가 높은 의례를 구현하고자 했다.<ref>{{서적 인용|author=구범진|authorlink=|title=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series=|year=2019|publisher=까치글방|page=300~301|isbn=9788972916826}}</ref>
 
홍 타이지는 총 다섯 차례에 걸친 중원 침공 중에 북경성을 포위하기도 하고 북경 인근 지역과 산서·산동의 여러 주현을 약탈하며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였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성도 거점으로 유지하지 못했다. 산해관을 피해 화북으로 우회하는 행군이 효과적인 전략이기는 했지만, 산해관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상 진정한 의미의 정복 전쟁으로 발전시킬 수 없었다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홍 타이지는 먼저 산해관 외곽의 4개의 성, 즉 금주, 송산, 행산, 탑산을 공략하여 산해관에 접근하고자 하였다.<ref>{{서적 인용|저자=魏源|저자링크=|제목=聖武記|권=1|연도=1984|출판사=中華書局|쪽=29}}</ref><ref>{{저널 인용|저자=박민수|날짜=2018년 6월|제목=홍타이지 시기(1627-1643) 만주의 對 중국 전략|url=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7485629&language=ko_KR|저널=군사|출판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권=|호=107|doi= |확인날짜=2019년 6월 6일|쪽=222~223}}</ref>
 
1640년 3월 18일, 홍 타이지가 지르가랑과 [[아이신기오로 도도|도도]]를 각각 좌·우익 군의 대장으로 임명하여 금주 근방에 주둔시키고 둔전을 행하여 공격 거점을 구축함으로써, 송산(松山)·금주(錦州) 전투가 발발했다발발했고,<ref>{{저널 인용|저자=박민수|날짜=2018년 6월|제목=홍타이지 시기(1627-1643) 만주의 對 중국 전략|url=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7485629&language=ko_KR|저널=군사|출판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권=|호=107|doi= |확인날짜=2019년 6월 6일|쪽=223}}</ref>
1642년 4월, 마침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산해관 외곽 2백 리 지역의 명의 군사 거점을 붕괴시켜 관외 지역을 석권하고 산해관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했다.<ref name="Park">{{저널 인용|저자=박민수|날짜=2018년 6월|제목=홍타이지 시기(1627-1643) 만주의 對 중국 전략|url=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7485629&language=ko_KR|저널=군사|출판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권=|호=107|doi= |확인날짜=2019년 6월 6일|쪽=226}}</ref>
 
송금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요서 지역을 거점으로 확보하자, 한졷한족 관료들은 좀 더 과감하게 북경을[[북경]]을 직접 공격할 것을 상주하였다.<ref name="Park"/> 그러나 홍 타이지는 무리해서 산해관을 장악하거나 북경을 점령할 의도가 없었고, 가능하다면 명과명나라와 화의를 맺고 청 내부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려 하였다.<ref>{{저널 인용|저자=박민수|날짜=2018년 6월|제목=홍타이지 시기(1627-1643) 만주의 對 중국 전략|url=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7485629&language=ko_KR|저널=군사|출판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권=|호=107|doi= |확인날짜=2019년 6월 6일|쪽=229}}</ref>
1642년 4월, 마침내 홍 타이지는 송산·금주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산해관 외곽 2백 리 지역의 명의 군사 거점을 붕괴시켜 관외 지역을 석권하고 산해관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함으로써 산해관을 통한 중원 진입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해 10월 홍 타이지는 아바타이를 봉명대장군(奉命大將軍)에 임명하여 제6차 중원 침공에 나서게 하였다. 이번에도 산해관을 우회하여 장성을 넘어간 청군은 북경 외곽을 거쳐 산동까지 거침없이 누비며 약탈전을 수행하였다. 이때 총 88개 성을 점령하고 금 1만 2천여 량, 은 220만 량, 포로 37만 명, 타마(駝馬)·나려(騾驢)·우양(牛羊) 32만 마리를 획득하였다. 이듬해 6월 8개월 동안 신속한 이동으로 인한 군사들의 피로로 인해 묵던으로 귀환할 때까지 청군은 장장 8개월간 북경 인근 지역과 산동 일대를 무인지경으로 휩쓸고 다녔다휩쓸었다.<ref>{{저널 인용|저자=박민수(2018),《|날짜=2018년 6월|제목=홍타이지 시기(1627-1643) 만주의 對 중국 전략》,|url=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7485629&language=ko_KR|저널=군사|출판사=국방부 國防部군사편찬연구소|권=|호=107|doi= 軍史編纂硏究所.|확인날짜=2019년 6월 6일|쪽=228}}</ref>
송금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요서 지역을 거점으로 확보하자, 한졷 관료들은 좀 더 과감하게 북경을 직접 공격할 것을 상주하였다. 그러나 홍 타이지는 무리해서 산해관을 장악하거나 북경을 점령할 의도가 없었고, 가능하다면 명과 화의를 맺고 청 내부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해 10월 홍 타이지는 아바타이를 봉명대장군(奉命大將軍)에 임명하여 제6차 중원 침공에 나서게 하였다. 이번에도 산해관을 우회하여 장성을 넘어간 청군은 북경 외곽을 거쳐 산동까지 거침없이 누비며 약탈전을 수행하였다. 이때 총 88개 성을 점령하고 금 1만 2천여 량, 은 220만 량, 포로 37만 명, 타마(駝馬)·나려(騾驢)·우양(牛羊) 32만 마리를 획득하였다. 이듬해 6월 8개월 동안 신속한 이동으로 인한 군사들의 피로로 인해 묵던으로 귀환할 때까지 청군은 장장 8개월간 북경 인근 지역과 산동 일대를 무인지경으로 휩쓸고 다녔다.<ref>박민수(2018),《홍타이지 시기(1627-1643) 만주의 對 중국 전략》, 國防部 軍史編纂硏究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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