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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靺鞨; {{zh|order=t|t=靺鞨|s=靺鞨|p=Mòhé}})은 《[[북제서]]》 무성제기(武成帝紀) 하청(河淸) 2년조(563년)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실위]], [[고막해]], [[거란]] 등과 함께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해 왔다는 것이다. 북제에 대한 말갈의 조공은 무평(武平) 6년(575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수서]]》 단계에 이르러서는 독립된 열전이 설정되었다.<ref name="HYUN">{{서적 인용|author=김현숙|authorlink=|title=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series=|publisher=모시는사람들|year=2005|isbn=9788990699305|page=438~439}}</ref>
 
말갈의 전사(前史), 즉 그 선대와의 계보 관계는 『구당서』 말갈전에 "말갈은 곧 [[숙신]]의 땅이다. [[후위]](後魏) 때에는 이를 [[물길]]이라 하였다."고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신당서]]》 흑수말갈전에는 "[[흑수말갈]]은 숙신 땅에 있는데, 또한 [[읍루]]라고도 하며 후위 때에는 물길로도 불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사서의 이러한 계보관은 후대 [[금나라]]의 선조 의식과 연결되어 고대의 숙신 → [[동한]]의 읍루→ [[원위]]의 물길→ 수당의 말갈─ 요금의 [[여진]]이란 중국 [[정사]]의 말갈 계보가 완성되었다.
 
말갈 유적에서는 도기를 비롯하여 청동 장식품, 철제 공구, 무기, 갑옷, 마구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철제 무기류가 많은데 비해 농기구류는 수량과 종류가 그다지 풍부하지 않은 편이다. 이는 말갈이 전형적인 농경인이 아니라 반농반수렵민이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ref>김현숙,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출판, 2005<name="HYUN"/ref>
 
== 어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