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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p of Goguryeo.jpg|섬네일|260px|중국의 [[고구려]] 영역도]]
 
현재현대 중국 학계에서는 말갈 제부의 실제 규모와 상관없이 이들의 활동 지역을 곧 광역의 말갈 영역으로 인식함으로써 위 지도에서 보이듯 고구려의 동북 영역을 크게 축소시켜 놓았다. 위 지도는 최대판도 를 그렸는데 특정 시기에는 적어도 속말부와 백산부의 영역이 고구려 영역에 포함되었고, 백돌ㆍ안거골ㆍ불열ㆍ호실부 역시 간접 통치의 범위에 속한다고 보는 한국 측의학계의 인식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말갈 유적이 발견되는 지역을 곧 말갈의 정치적 영역으로 보는 것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고구려는 지방을 지배할 때 일부지역 집단에는 간접 지배의 방식을 취하면서 고구려 문화를 강제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말갈에 대해 직접지배 방식이나 고구려 문화를 강제하지 않은 것은 고구려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방통치의 효용성에 따른 것이다것이었다. 그리고 말갈 제부 중 속말과 백산은 일찍이 직접지배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추정되기도 한다. 속말말갈 지역인 길림시 일대에는 용담산성, 동단산성, 삼도령산성 등 고구려 산성이 축조되어 있었고, 백산말갈 지역에는 살기성을 중심으로 훈춘시 경내와 성자산산성 및 용정시와 연길시 경내 등에도 고구려 산성이 분포했다. 산성은 4세기 이후 고구려의 지방 지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으로, 산성의 존재는 고구려의 지방관이 산성을 거점으로 지방 통치를 수행했던 증거라고흔적으로 한다추정된다.<ref name="Hyeong">{{서적 인용|author1=정병준|author2=권은주|author3=이효형|author4=바이건싱|author5=윤영인|author6=김위현|author7=왕위랑|authorlink=|title=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series=|publisher=[[동북아역사재단]]|isbn=9788961870566|page=50~56}}</ref>
 
수, 당과의 전쟁시 고구려의 말갈병 동원상황을 통해서 볼 때 고구려의 말갈 지배가 원활하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 후기에 이들 지역의 말갈족은 고구려민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백돌ㆍ안거골ㆍ불열ㆍ호실부의 경우 간접 지배를 받았지만 그들도 고구려민으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멸망하고 난 뒤 대부분 자신의 단위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분산미약(奔散微弱)'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유물이나 유적을 정치적 영역이나 세력권을 파악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은 고구려에 적용하기 힘들며, 역으로 말갈 유적 분포 현황을 가지고 곧바로 말갈의 영역이나 세력권으로 보는 것도 실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ref>{{서적 인용|author1name=정병준|author2=권은주|author3=이효형|author4=바이건싱|author5=윤영인|author6=김위현|author7=왕위랑|authorlink=|title=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series=|publisher=[[동북아역사재단]]|isbn=9788961870566|page=50~56}}<"Hyeong"/ref>
 
말갈 특수부대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은 수·당과의 전쟁전쟁의 때로 국왕 직속 군대로 편제된 말갈족은 호전적이고 민첩한 종족적 성격에 걸맞게 고구려 멸망기와 부흥운동의 과정에서 눈에 띄는 활동상을 보여주었는데, 이 경우 말갈족들은 고구려 주민의 일원으로서 외부의 적을 맞아 나라를 지키는 고구려군으로 활동했다고 본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말갈족들이 부흥운동을 일으킨 것과 훗날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는 발해 건국에 적극 참여한 것도 결국 그들이 고구려인으로 살았고 스스로도 고구려민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완전한 고구려인으로서 활동했던 말갈족이 바로 수·당대 말갈 7부 가운데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이라고 보았다.<ref>김현숙(2003), 「6~7세기 고구려사에서의 말갈」, 『강좌한국고대사』 10,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ref><ref>''김현숙, 1992, 「高句麗의 靺鞨支配에 관한 試論的 考察」,『한국고대사연구』 6.''</ref> 그러나 부락 공동생활을 해왔을 속말말갈의 경우 고구려에 귀부하여 한 세기도 경과하지 않은 동안, 고구려인과 달리 얼마나 고구려화하여 고구려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설혹 일부가 고구려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하여 그들이 곧 고구려 [[민족|종족]]은 아니다. 종족은 본인의 귀속의식과 무관한 자타공히 인지할 수 있는 혈통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나름의 역사와 문화 등을 영유한 구별 가능한 인간집단이다.인간집단으로, [[송기]]도 전통적 관점에서 모종의 사료에 근거하여, 발해 건국 세력의 일부를 속말말갈 종으로 파악하였을 것이다것으로 추정된다.<ref>''김기흥(2011), 「발해의 종족적 연원」, 『동북아역사논총』 33, 456쪽~457쪽</ref>
 
말갈 특수부대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은 수·당과의 전쟁 때로 국왕 직속 군대로 편제된 말갈족은 호전적이고 민첩한 종족적 성격에 걸맞게 고구려 멸망기와 부흥운동의 과정에서 눈에 띄는 활동상을 보여주었는데, 이 경우 말갈족들은 고구려 주민의 일원으로서 외부의 적을 맞아 나라를 지키는 고구려군으로 활동했다고 본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말갈족들이 부흥운동을 일으킨 것과 훗날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는 발해 건국에 적극 참여한 것도 결국 그들이 고구려인으로 살았고 스스로도 고구려민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완전한 고구려인으로서 활동했던 말갈족이 바로 수·당대 말갈 7부 가운데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이라고 보았다.<ref>김현숙(2003), 「6~7세기 고구려사에서의 말갈」, 『강좌한국고대사』 10,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ref><ref>''김현숙, 1992, 「高句麗의 靺鞨支配에 관한 試論的 考察」,『한국고대사연구』 6.''</ref> 그러나 부락 공동생활을 해왔을 속말말갈의 경우 고구려에 귀부하여 한 세기도 경과하지 않은 동안, 고구려인과 달리 얼마나 고구려화하여 고구려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설혹 일부가 고구려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하여 그들이 곧 고구려 [[민족|종족]]은 아니다. 종족은 본인의 귀속의식과 무관한 자타공히 인지할 수 있는 혈통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나름의 역사와 문화 등을 영유한 구별 가능한 인간집단이다. [[송기]]도 전통적 관점에서 모종의 사료에 근거하여, 발해 건국 세력의 일부를 속말말갈 종으로 파악하였을 것이다.<ref>''김기흥(2011), 「발해의 종족적 연원」, 『동북아역사논총』 33, 456쪽~457쪽</ref>
=== [[속말말갈|속말부]](粟末部) ===
《수서》에는 속말부가 "[[고구려]]와 인접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속말말갈은 [[흑수말갈]]과 함께 말갈 7부 가운데 위치 비정상 논란이 가장 적은 집단이다. 속말말갈과 흑수말갈은 모두 거주지 인근의 강 이름에 따라 부명(部名)이 일컬어졌다. 즉 속말말갈은 속말수, 지금의 [[송화강]]가에 사는 말갈이라고 보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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