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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표}}
 
'''백제'''(百濟, {{llang|en|Baekje}}, [[기원전 18년]](?) ~ [[660년]] [[8월 29일]]<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1979578], [[오마이뉴스]] 2011년 4월 17일, 일간지 '오늘의 역사' 틀린 게 너무 많다</ref>)는 [[한국]]의 고대 국가 중 하나로,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를 구성하였다. 시조는 부여·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 집단으로 전해지며, 마한 54개 연맹체 중 하나인 백제국으로 시작해, 369년경4세기 중엽 [[근초고왕]](혹은 530년경 [[성왕 (백제)|성왕]] 때)에 마한 전체를 정복했다통일했다.<ref>{{저널 인용|저자=임영진|제목=전남지역 마한 제국의 사회 성격과 백제; 전남지역 마한 제국의 사회 성격과 백제|url=https://www.kci.go.kr/kciportal/mSearch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insiId=INS000011418&sereArticleSearchBean.sereId=SER000003883&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971601|총서=백제학보|권=11|날짜=2014년 3월}}</ref>
 
백제는 [[성왕 16년(538백제)|성왕]] 16(AD538)년에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천도하며, '''남부여'''(南扶餘)라는 국호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백제의 국호에 관하여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와 고려시대에 기록된 신라계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이 상이하여, 어느 쪽 기록이 정확한지는 정의할 수 없다.<ref group="주">[[538년]]에 [[백제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였다.</ref> 백제에서는 왕(王)을 "어라하"라고 불렀고 백성들은 "건길지"라고 불렀다고 중국인이 쓴 "주서"에 한 차례 나온다. 하지만 백제 왕족이 일본에 방문을 할 때마다 일본에서의 "건길지"의 명칭인 "こにきし"(코니키시)가 수 차례 계속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백제 왕족들도 왕(王)을 "건길지"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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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집단이 한강유역에 정착하였을 때 이 지역은 직산-천안을 중심으로한 목지국 중심의 마한에 속하여 있어 마한으로부터 100리의 땅을 할애받아 십제를 세우고 미추홀 지역의 비류집단과 연맹을 형성하여 초고왕때 지역연맹의 맹주가 되어 백제라고 이름을 고쳤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접근했을 때, 백제국의 백성 절대 다수는 경기-충청-전라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이후 장기간 성장한 주민집단이다. 고구려의 기원을 고찰하면서 맥족 이동설을 부정하고 고구려의 등장을 압록강 중류지역과 혼강 유역에서 적석총을 조영하며 생활해 왔던 토착민 사회의 성장을 중시하는 견해는 백제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에도 많은 시사를 준다. 설령 부여나 고구려에서 소수의 주민이 이주하여 백제 왕실 구성에 일조하였다고 하더라도 백제인의 주축이 재지계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한강유역의 재래 집단에 고구려계, 부여계, [[옥저|옥저계]], [[예맥|예계]] 주민이 합류하였을 개연성은 매우 높지만, 이에 못지않게 [[신라|신라계]], [[가야|가야계]], 중국계 주민도 고려되어야 한다. 왜인들이 한반도 서남부, 그리고 공주와 부여 일대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음도 고고학적 발굴조사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백제사회는 고대의 다문화 사회였던 셈이다. 따라서 백제의 기원이 부여냐 고구려냐 하는 질문 자체가 전근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이란 비판을 면할 수 없다.<ref>''권오영(2018), 《백제와 부여의 계승성 여부에 대한 검토》, 동북아역사논총 제61호, 250~251쪽.''</ref>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나라]]의 군현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차츰 성장해 나갔다. [[3세기]] 중엽 [[백제 고이왕|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소금의 산지였던 인천까지 영향권에 넣었다.<ref>한 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역사 52쪽, 경기도사편찬위원회, 2008년 9월</ref>또한 이때부터 중국 산동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고이왕 시기 고대 한반도에서는 큰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246년에 진한(辰韓)의 8국을 분할하는 문제로 마한과 낙랑·대방군(樂浪·帶方郡)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전쟁에서 마한은 대방태수(帶方太守)를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렸지만 결국 패배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목지국(目支國)의 위상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백제는 기존의 마한 54개 부족연맹체의 우두머리였던 목지국을 제압하고, 새로이 마한의 맹주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