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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웅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중화민국]] [[충칭]](重慶)에서 조선의열단 김근수 지사와 여성 광복군 전월선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백범 김구의 중매로 연을 맺었다.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대전에 정착했다. 그는 대전고를 거쳐 서울대 정치학과를 다녔다. [[중화민국]] 정부의 장학금으로 중국 국립 정치대학 대학원에 유학했다.
 
대학생 시절 박정희정부의 한일조약체결 반대운동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졸업 후 집권당인 공화당 사무처 공채에 합격하여 정당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생긴 민자당 합류를 거부하고, 박찬종, 노무현, 이철 등과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 출마하여 국회에 입성했다. 제정구, 이부영, 유인태, 원혜영 등 초선의원 12명과 함께 ‘깨끗한 정치 실천선언’을 하여 모든 정치인, 공직자의 재산공개, 정치자금공개를 주도했다. 1995년 일제잔재인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는 교육법 개정을 주도했다. ‘가장 깨끗한 정치인’으로 정치부 기자들이 뽑기도 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지역주의 청산을 내세우고 (꼬마)민주당 후보로 대전 대덕에 출마했으나 지역주의 바람으로 낙선했다. 낙선 후 노무현, 제정구, 유인태, 이철, 원혜영, 박석무, 김홍신 등과 ‘하로동선(夏爐冬扇)’이란 상호로 식당을 개업하고 대표는 김원웅이, 감사는 노무현이 맡았다. 1998년1997년 (꼬마)민주당과 신한국당이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되었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 대전 대덕에서 출마, 청렴성과 개혁성에 힘입어 충청권에서 유일하게 한나라당 당선자가 되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민족화해협력 반대와 기득권층 비호의 노선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당내 갈등이 심화되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 당선이 확실시되자 많은 정치인들이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길 때 이를 ‘철새’라 비판하며, 대선여론조사에서 크게 열세인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하였다. 개혁당 창당에 막후역할을 하고 이어 당대표를 맡아 노무현정부 창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시절 비공개 특사로 평양을 방문, 민족평화축전 개최를 합의하고, 해방 이후 최대의 남북공동행사였던 민족평화축전을 2003년 10월 제주도에서 성공적으로 마쳤다. 일제가 약탈해 간 문화재의 환수위원회를 결성하고, 평양을 방문, 남북공조로 일본을 압박하여 북관대첩비, 조선왕조실록 및 조선왕실의궤를 되돌려 받기도 했다. 2004~2006년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도덕성에 힘입어 국회의원의 비리, 부패를 심사하는 국회 윤리특별위원장의 직책을 맡았다. 2006~2008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으로 한미FTA협상에 임하면서 미국을 10여 차례 방문, 미국 의회와 국무성의 고위인사와 담판하여 한류의 바탕이 되고 있는 스크린쿼터제를 지켜냈고, 개성공단제품을 한미FTA에 포함시켰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침략으로 비판받는 이라크전에 한국군 파병 등 불리한 여건 속에서, 반기문 UN사무총장의 선거대책위원장 역할을 맡아 세계 주요국가 지도자들을 설득해냈다. 2007년 17대 대통령선거에 출마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실제 출마하진 못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4당 연합후보(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로 대전시장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