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내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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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국]]으로부터의 지원을 받은 [[크메르 루주]]는 정부군과 전투를 계속해 나갔으며, [[1973년]]에 미군이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하면서 론 놀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결국 [[1975년]] 4월, 론 놀은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이웃 나라 베트남에서는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베트남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이후, 크메르 루주가 수도 [[프놈펜]]에 입성하였고, [[1976년]] 1월에 〈캄보디아 민주헌법〉을 공포하여, 국명을 [[민주 캄푸챠]]로 개칭했다.
 
프놈펜 함락 후, 크메르 루주는 "도시 주민의 양식은 도시 주민 자신이 경작한다."라고 선언하고, 도시에 거주하는 주민, 자본가, 기술자, 학자, 지식인 등의 모든 재산과 신분을 박탈하고 교외의 농촌으로 강제 집단이주를 단행했다. 그들은 농민으로서 농업에 강제 부역하였고, 거의 대부분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반란의 주모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크메르 루주 내부의 간부도 살해당했다. 혁명의 성공을 기뻐하면서 나라의 발전을 위해 귀국한 유학생이나 자본가도 모두 살해당했다. 또 아이는 부모로부터 갈라놓고 집단 생활을시켜생활을 시켜, 어릴 때부터 농촌이나 공장에서 노동이나 군복무를 강요했다. 폴 포트 시대의 기아와 학살에 의한 사망자는 70만~300만명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캄보디아에서는 [[1968년]]을 마지막으로 국세조사는 행해지지 않았고, 게다가 폴 포트 이전의 내전이나 공습에 의한 희생이나 인구의 난민화에 의해, 집계할 수 있는 인구통계가 미비했기 때문에 정확한 희생자수를 추정하기 어렵다.
 
크메르 루주 통치 하의 잔학행위에 관한 가장 초기의 기술 중 하나는, 사린에 의해서 [[1973년]]에 쓰여졌다. 그는 크메르 루주의 간부였지만 폴 포트 및 민주 캄프챠에 환멸을 느껴 당을 떠나, 9개월 후에 몰래 [[프놈펜]]으로 돌아왔다. 그의 저서 《크메르의 영혼에 대한 후회》(Sranaoh Pralung Khmer)는 크메르 루주가 존재를 비밀로 한 상부 기구, 중앙위원회를 분명히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