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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민태자'''(懿愍太子, [[1897년]] [[10월 20일]] ~ [[1970년]] [[5월 1일]])는 [[한국사]]의 마지막 [[황태자]]이자 [[일본 제국]]의 군인이다. [[휘]]는 '''은'''(垠), 아명은 '''유길'''(酉吉), [[자 (이름)|자]]는 '''광천'''(光天),<ref>{{웹 인용|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영친왕의 자를 광천으로 정하다|날짜=1907-02-27|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4402027_003}}</ref> 아호는 '''명휘'''(明暉),<ref>{{뉴스 인용|제목=이방자 여사 설립 명휘원 40주년 맞아|출판사=연합뉴스|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782894|날짜=2007-10-12|저자=심언철}}</ref> '''명신재'''(明新齋)이며,<ref>{{뉴스 인용|제목=〈100년 私學〉 (9) 걸어온 길|출판사=한국일보|날짜=2005-06-12|저자=박선영|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286488}}</ref>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 사후에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문인무장지효명휘의민황태자'''(文仁武莊至孝明暉懿愍皇太子)라는 시호를 올렸으나 정식 시호가 아닌 [[사시 (시호)|사시]]이다. 황태자로 책봉되기 이전의 작호인 '''영친왕'''(英親王)으로도 알려져 있다.{{#tag:ref|‘친왕’(親王)이라는 용어는 일본이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영친왕’이 아니라 ‘영왕’(英王)이 올바른 호칭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황제의 아들을 친왕으로 책봉하는 제도는 본래 중국에서 유래한 제도이다.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한 고종도 자신의 아들을 모두 친왕으로 책봉하였다. 이은은 이에 따라 영친왕으로 책봉되었고, 궁내부 관제로 ‘영친왕부’도 설치되었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 《매천야록》을 비롯한 당시 작성된 서적에서도 영친왕으로 표기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ref>{{뉴스 인용|제목=황실용어 제대로 쓰자|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0&aid=0000309144|저자=송우혜|출판사=동아일보|날짜=2005-07-25}}</ref><ref>{{뉴스 인용|제목=한말 ‘親王’ 표현이 일제식이라고요?|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1&aid=0002026677|저자=최영창|출판사=문화일보|날짜=2010-02-24}}</ref>|group="주"}}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순헌황귀비]] 엄씨<ref>{{웹 인용|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황자가 탄생하다|날짜=1897-10-20|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3410020_005}}</ref><ref>{{웹 인용|url=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710&index_id=cp07100162&content_id=cp071001620001&print=Y|제목=경선궁과 덕안궁|저자=문화콘텐츠닷컴|확인날짜=2014-05-08}}</ref>이다. [[대한제국 순종|순종]]과 [[의친왕]], [[덕혜옹주]]와는 이복 형제이다. 1897년에 [[덕수궁|경운궁]] 숙옹재에서 태어나 의친왕을 제치고 병약하여 아들이 없었던 순종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7년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하여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1910년에 [[한일 병합]]으로 대한제국 황제가 왕으로이왕으로 격하되면서 왕세자가이왕세자로 되었으며격하되었으며, 1920년에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내친왕]]과 정략혼인을 하였다. 1926년에 순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제2대 [[이왕|창덕궁 이왕]](李王)이 되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 [[중장]]에 이르렀다. 1963년에서야 혼수상태인 채 [[대한민국]]에 영구 귀국하여 병상에서 생활하다가 1970년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남양주시)|금곡동]]의 [[홍유릉]]에 안장되었으며, 원호는 [[영원 (무덤)|영원]](英園)이다.
 
이은이 대한제국의 황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제국 육군에 복무하였고, 일본 황족과 결혼하였으며,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친일 논란이 있다.<ref name="정진석"/>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인명사전 명단에서 제외하였다.<ref name="친일인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