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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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건국 ===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의 땅을 [[평양]]에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천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대조영과 걸걸중상 부자도 고구려 유민으로 [[영주]](榮州)로 이주하게 되었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 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거란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사리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도중 말갈을 이끌던 걸사비우와 고구려 유민을 이끌던 대사리 걸걸중상이 죽으면서 그들이 이끌던 무리를 대조영이 이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ref>일설에는 대사리 걸걸중상과 대조영을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ref>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 당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에 위치한 [[읍루]]의 [[동모산]](東牟山)<ref>육정산(六頂山)</ref> 기슭을 차지하고, 곧 [[진국]](震國, 振國)을 건국{{출처|날짜=2018-07-26}} '''혹은''' 진국왕(振國王)을 자칭하고, [[말갈]]을 건국했다.<ref>金香(1989) , 「關于渤海國的若干民族問題」, 『社會科學戰線 』 1期(『高句麗渤海硏究集. 成』), 渤海 권1 27쪽</ref><ref>《[[구당서]]》권199하, 「열전」149하 북적 발해말갈 ''祚榮驍勇善用兵, 靺鞨之眾及高麗餘燼, 稍稍歸之. 聖曆中, 自立為振國王, 遣使通於突厥.''</ref>
 
[[당 중종]]은 대조영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의일대에 대한 지배가 발해에사실상 넘어가자어려워지자{{출처|날짜=2018-07-26}}, 705년 책봉을 시도했지만, 불발되었다.<ref>《[[구당서]]》 212권 북적 발해말갈 ''中宗即位, 遣侍御史張行岌往招慰之. 祚榮遣子入侍, 將加冊立, 會契丹與突厥連歲寇邊, 使命不達.''</ref>
 
[[713년]], [[당 예종]]은 낭장(郎將) 최흔(崔昕)을 보내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고 다스리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ref>А.Л. Ивлиев(2005), Российский Дальний Восток в древности и средневековье: открытия, проблемы, гипотезы, 453쪽 ''홀한주는 당의 문서에만 언급되는 명목상 주임이 틀림없는데, 발해의 수도를 지나 흐르는 목단강의 옛 명칭 후르하(Hurha)와 상응한다.''</ref>로 만들어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의 벼슬을 추가했다.<ref>《[[구당서]]》 212권 북적 발해말갈 ''睿宗先天二年, 遣郎將崔昕往冊拜祚榮為左驍衛員外大將軍、渤海郡王, 仍以其所統為忽汗州, 加授忽汗州都督, 自是每歲遣使朝貢.''</ref>, 또한 당나라 조정은 발해를 [[신라]]와 같이 이웃 국가로 인정하여 국제적으로 안정성을 보장하였고, 당의 세계질서에 편입하는 듯이 하였고, 발해는 곧 새로운 민족명이 되었다.<ref>《[[책부원귀]]》봉책 선천 2년 3월 ''玄宗先天二年(713) 二月 拜高麗大首領高定傅爲特進 是月 封靺鞨大祚榮爲渤海郡王(大祚榮, 聖曆千自立爲振國王在營州東二千里. 兵數萬人, 至是, 遣郞將崔訢往冊命祚榮左驍衛員外大將軍渤海郡王. 仍以其所統爲汗州都督, 自是每歲遣使朝貢.''</ref><ref>А.Л. Ивлиев(2005), Российский Дальний Восток в древности и средневековье: открытия, проблемы, гипотезы, 453~454쪽</ref> 당나라 측천무후가 50만대군을 이해고에 주구 발해를 공격하지만 발해는 요동에서 당나라를 격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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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전 ===
문왕은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나라의 문화를선진문물을 어느 정도 사용하여받아들여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756년 수도를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 용천부|상경]]으로 옮겼다. 이곳은 만주에 살고 있는 여러 세력의 주된 이동로이자 물자 교류의 중심지였으며, 농사를 짓기에도 한층 수월한 지역이었다. 발해의 수도가 상경으로 옮겨진 이후에는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인구도 크게 늘었다. 발해는 당의 문물도 수용하여 3성(三省)<ref name="3성">정당성·중대성·선조성(正堂省·中臺省·宣詔省)</ref>과 6부(六部)<ref name="6부">충·인·의·예·지·신부(忠·仁·義·禮·智·信部)</ref>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부(京府)·주(州)·현(縣)으로 구성된 3단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다. 또 상경을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 각지를 연결하는 대외 무역에 더 힘을 쏟았다. 발해는 문왕 때부터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었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종래의 대립 관계를 해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동시에 돌궐 및 일본 등과도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신라와 당나라를 견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발해는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였고, 762년 당나라는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직인 발해국공(渤海國公)을 수여하였다.
 
한편 문왕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ref>[[흑룡강성]] 휘춘현 팔련성</ref>로 천도하였으나, 5대 성왕(成王) 때 다시 [[상경 용천부]]로 천도하였다. 상경 용천부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 793년 문왕이 죽은 이후 [[발해 폐왕|대원의]](大元義)·[[발해 성왕|성왕]](成王)·[[발해 강왕|강왕]](康王)·[[발해 정왕|정왕]](定王)·[[발해 희왕|희왕]](喜王)·[[발해 간왕|간왕]](簡王)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국력은 지도층의 내분으로 점점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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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장국종은 발해국호는 698년에 사용하였고, 그 이전에는 [[걸걸중상]]에 의해 건국된 진국이라는 공국이 선행하였으며, 그것이 대조영에 의해 발해로 확대되었다고 주장했다.<ref>장국종(1997), 『발해사연구』, 사회과학출판사</ref><ref>장국종(2001), 『발해국과 말갈족』, 사회과학원</ref>
 
=== 발해 국호 유래 ===
[[김육불]]은 [[산동]]의 발해군과 발해 국호를 연관시키면서 발해와 말갈이 음성학적으로 동일음이기 때문에 발해라 명명하였다고 주장하였다.<ref>金毓黻(2007), 『김육불의 東北通史 下』 권5, 동북아역사재단, 573~574쪽</ref> 그러나 조평춘은 말갈이 발해로 와전되었다는 학설을 반박하면서, 발해 국호가 바다에서 유래한 명칭이며 [[당나라]]가 자국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 의도로 발해라는 국호를 사용토록 했다고 주장했다.<ref>趙評春( 1987), 「'渤海國'名源考辨」, 『學習與探索』 5期(『 高句麗渤海硏究集成』 渤海. 卷1, 哈爾濱出版社, 39쪽~41쪽</ref>
 
==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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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재일교포]] 출신으로서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과 [[와세다대학교]] 조선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목간학회 회장을 역임 중인 리성시(李成市)에 따르면, [[중국]] 동북부에서 흥기했던 여러 민족들은 심지어 [[금나라]]에 이르기까지 왕권과 기원의 정통성을 [[부여]], [[고구려]]에서 찾고있었는데, 이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대외적으로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여 정치적 우위를 지키고자 하는 의도이며, 고구려 계승이 곧 바로 혈연적 계승관계로 연결시킬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ref>李成市(1988),「渤海史硏究における國家と民族-「南北國時代」論の檢討を中心に->≪朝鮮史硏究會論文集≫ 25쪽</ref>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인 [[송기호]]는 발해에게서 이러한 고구려 계승 의식이 표출된 이유는 여러 정황상 [[대조영]]은 고구려인이지만[[말갈족]]이지만, 피지배민족들인 말갈족들은 고구려에 귀속되어, 일정부분 고구려화 되었고, 걸걸중상을 거치면서 더욱 가속화되어 고구려인으로서말갈계 말갈계들을 이끌고고구려인으로서, 고구려 귀속의식이 나타나게 되어 훗날 발해국을 운영하는 기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ref>송기호(1991), 「大祚榮의 出自와 발해의 건국과정」『아시아문화』7, 한림대학교아시아문화연구소</ref>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이종욱은 이성시와 견해를 조금 달리하여, 발해에는 고구려인들이 많이 살았고,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더욱이 속말말갈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장군으로 근무한 바 있기에 새로운 왕국을 갖출 정보와 힘이 있었다고있었지만, 한다그러한 발해에 살게된 고구려인들은 한국·한국인을 형성한 원류에서 떨어져 한국과 연속성이 없는 집단이라고 비판했다.<ref>이종욱(2005), 《고구려의 역사: 왜곡되고 과장된 고대사의 진실을 복원한다》, 김영사</ref>
 
 
 
== 사회 및 주민구성 ==
=== 지배층의 구성 ===
발해는 지배층인다종족 왕국으로 고수려 유민과 피지배민족들인 대다수의 말갈 외에 피지배민족 [[한족]], [[거란족]], [[실위]], [[위구르족]] 등 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ref>나영남(2017), 「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 『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 12』 , 신서원, 155쪽</ref> 발해 지배층의 족속 구성에 대해서 여러 학설이 대립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송막기문]]》에 발해의 왕은 옛부터 대씨를 성으로 삼으며, 우성에는 고, 장, 양, 두, 오, 이씨 등이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발해 지배계층 성씨 70% 이상이 고구려 계통이라고 추정하는데,<ref>나영남(2017), 「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 『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 12』 , 신서원, 120쪽</ref>,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림호성이 발견한 기록에 전해지는 발해인 201명 가운데 그 수가 33명으로 16.41%를 차지하는 것이 고(高)씨다.<ref>림호성(2004), 「발해의 기본주민은 고구려유민」, 『고조선·고구려·발해 발표 논문집』</ref> 하지만, 발해 고씨는 대체적으로 고구려 귀족 성씨였지만, 말갈인들도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고,<ref>王承禮·宋基豪(1987),『발해의 역사』, 춘천, 한림대학출판부, 126~127쪽</ref> 이외에 하씨, 양씨, 오씨, 이씨 등의 성씨는 고구려계와 한계 그리고 말갈계가 공유하는 성씨일 가능성이 높으며,<ref>나영남(2017), 「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 『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 12』 , 신서원, 118~119쪽</ref> 발해 지배층 성씨에 대씨와 이씨를 가진 속말말갈인을 더 하면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에서 말갈인의 비율이 더 높다는 반론도 존재한다.<ref>魏國忠, 朱國枕(2006), 『渤海國史』, 中國社會科學院出版社, 226쪽</ref> 하지만 이성시는 발해는 고구려 귀족들로 이루어진 지배층와 말갈인 피지배층으로 이루어진 이원화된 사회가 아니라 [[만주]] 지역에서 다양한 부족들이 서로 연합한 국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발해를 [[남북국시대|남북국]]으로 묶어서 이야기 하기 위해 굳이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를 단순한 지배 피지배의 관계로 서술하는 종래의 [[민족사학]]의 서사에는 근원적인 문제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ref>{{서적 인용|author=이성시|authorlink=|title=만들어진 고대|series=|publisher=삼인|year=2001|isbn=9788987519586|page=}}</ref>
 
[[육정산 고분군]]의 비교적 대형의 고분을 밀집되어 있는 제1구역 중하부에는 고분 양식면이서 고구려 영향을 크게 반영하고 있지만, M5에서 말 뼈와 같은 짐승뼈가 이곳에서만 다수 출토된 점과 다인장을 보여줘 말갈적 요소에 가까운 M3을 볼 때, 역시 말갈적인 전통이 함께 스며 있음을 보여준다. 제1구역 상부와 제2구역이는 말갈계 토광묘가 포함되어 있고, 화장의 현상이나 통형관의 출토도 이곳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점으로 보아 말갈적인 요소가 제1구역 중하부보다 더 강하게 드러난다. 명심해야할 것은, 고분 자료만 가지고 매장자의 혈통을 따질 수 없다. 예컨대 말갈 혈통을 지닌 고구려인이 있다고 가정할 때에 무덤에서는 고구려적인 문화 요소가 강조되어 나타나거나, 때에 따라서는 고구려 문화 요소만 나타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ref>{{서적 인용|author=송기호|authorlink=|title=발해 사회문화사 연구|series=|publisher=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year=2011|isbn=9788952111470|page=10, 36~37}}</ref>
 
신분적으로 높았던 제1구역 중하부에 위치하는 M1~M10의 고분 가운데, [[정혜공주]] 무덤인 M2는 고임식 천정을 비롯하여 고분 축조 양식에서 고구려 전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고, 내부에 회칠을 하고 벽화를 그린 점도 고구려의 영향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 일부 출토 유물이나 바닥에 깐 벽돌에서 [[당나라]] 문화가 결합돼 있는 사실도 인정된다. 또 진릉(珍陵)으로 추정되는 M6에서도 벽화편과 돌사자상 파편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서 역시 고구려의고구려와 문화요소가당 문화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이들의 주인공이 왕실 인사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대씨 일족이 말갈 혈통을 지녔는지 아니면 고구려 혈통을 지녔는지 고고 자료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다분히 고구려 문화를 지니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주 체재시 또는 발해 건국 이후에 당나라 문화를 체득했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발해 최상층부이서는 기본적으로 고구려 문화를 항유허던 인물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말갈 문화를 지니고 있던 일부 인물들이 포함됐을 것이다.
 
제2구역에 비해 제1구역 중하부 그룹과 친연관계를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분적으로 또는 다른 요인으로 구분이 되는 그룹인 제1구역 상부에서는 M11에서 짐승뼈가 출토됐고, M101에서 통형관이 확인됐으며, 다인정과 2차장 현상아 보인다는 점에서 말갈적인 요소를 더 띠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짐승뼈가 출토된 점이나 화장 현상이 보이지 않는 점에서는 제2구역과 구별되는 독립성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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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속말말갈의 중진통형관(重唇筒形罐)은 고구려계의 토기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속말말갈 유적에서는 가장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기물로서 발해 후기에 오면 [[상경회령부]]를 비롯한 상층부에는 소멸되지만, 상경성 부근의 일반고분에서는 계속 존재하는 양상을 보이며 상경과 거리가 멀수록 수량도 상경부근보다 많다. 이는 발해 상층의 낙후된 토기공예 기술이 선진적인 토기제작 기술에 의해 대체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발해건국 당시 말갈들의 이런 토기제작 전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문화와의 접촉에서 새것을 받아들이면서 자연적으로 쇠퇴되어 가고 있음을 반영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ref>정영진(2009), 발해토기연구, 백산학회</ref>
 
[[서강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인 [[이종욱]]은 자신의 저서인 《고구려의 역사》에서 발해에는 [[고구려인]]들이 많이 살았고,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으며, 더욱이 속말말갈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장군]]으로 있었기에 새로운 왕국을 세울 정보와 힘을 갖출 수 있었던 것 등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발해에 살게된 고구려인들은 한국·한국인을 형성한 원류에서 떨어져 나간 역사 속의 한국인들로 현대 한국인에게 피를 전해 줄 기회를 잃게 된 집단이라고 일축했다.
 
프레데릭 W. 모트(Frederick W. Mote)는 발해인들은 본래 수렵과 어업활동을 했는데 발해인들은 정착 생활을 했고, 발해인들의 농경 인구는 정복한 [[한국인]]들이나 [[중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국인들은 발해라고 부르며 '발해'라는 용어는 많은 [[역사서]]에서 나타난다고 하고 한국 문화적 요소는 발해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ref>Frederick W. Mote, 《Imperial China 900-1800》(Cambridge, Ma. und London: Harvard uP, 1999), 2003, 33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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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발해의 문화}}
[[파일:National Museum 3.jpg|200px|왼쪽|섬네일|발해 유적지에 나온 용머리]]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 당나라, 말갈의 문화에서 당나라의 문화가 전파되었으며섞인 것이었으며, 당나라와 [[요나라]]의 역사서에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점을 들어 발해가 고급 문화를 향유했음을 시사한다.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정혜공주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구조가 고구려 고분과 닮았다. 이곳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있다. 또한 [[정효공주묘]]에서는 묘지와 벽화가 발굴되었다. 이런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을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ref> 국사 편찬 위원회, 국정 도서 편찬 위원회 (2004년 3월 1일). 《고등학교 국사》. 서울: (주)두산, 252~253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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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2012년]] 논문에서 [[여진 문자]]가 발해 문자에서 발전한 것이라 학설을 제기하였는데, 여전히 의문점이 있다.<ref>川崎保 研究メモ 『「渤海」文字資料からみた女真文字の起源に関する一考察 - ヴォヴィン論文(2012)を中心として -』 『古代学研究 202』 古代学研究会 2014년 7월, 34쪽</ref>
 
반면에, [[금 희종]]의 조칙 중, "모든 관원들을 임명하는 고명(誥命)은 여진인에게는 여진자(女眞字)를 사용하고, 거란(契丹)·한인(漢人)들은 각기 그들이 사용하는 문자를 사용토록 하되, 발해인에게는 한인(漢人)과 똑같이 하라<ref>''詔百官誥命女直、契丹、漢人, 各用文字, 渤海同漢人.''</ref>라고 한 것을 근거로 만약 발해가 멸망하기 이전에 이미 자기 종족의 문자를 창제하였다고 한다면, 금나라 초기에 여진·거란·한족(漢族)한인 등 여러 종족에게는 각기 자기 종족의 문자를 사용토록 할 때에는 발해족에게도 똑같이 사용을 허가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발해는 그 말기까지 문자를 창제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ref>王承禮, 《渤海的歷史與文化》, 延边人民出版社, 308쪽</ref>
 
==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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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이후의 세력 ==
발해 유민은 거란 통치자의 폭위에 핍박당하다 수종들을 거느리고 [[고려]], [[후당]] 및 이후의 [[북주]](北周), [[북송]] , [[여진족]] 등의 통치권 내로 도망하였다.도망하였으나, 많은 평민들은 계속해서 그 땅에 남았는데 어떤 이들은 거란 통치자에 의해 거란족이 거주하는 다른 지방으로 옮겨져서 분산・관리되었으며 마침내 그 지역의 거란, 여진족들과 융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종족공동체를 형성하였다.<ref>{{서적 인용|author1=정병준|author2=권은주|author3=이효형|author4=바이건싱|author5=윤영인|author6=김위현|author7=왕위랑|authorlink=|title=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series=|publisher=[[동북아역사재단]]|isbn=9788961870566|page=231}}</ref>
 
거란은 발해인들을 각 지역으로 이주시켰는데, 이에 대해서는 《[[요사]]》 지리지 중에 단편적인 기록이 보인다. 대규모의 이주는 크게 두 차례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929년 발해의 도성 [[홀한성]]의 발해인들을 요하 유역의 임황부(臨潢府: 지금의 遼陽市)로 이주시켜 거대한 공포감을 조성하였던 것과, 1029년 8월에 발해왕족의 후예 [[대연림]]이 무리를 이끌고 요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망한 이후, 거란의 통치자가 반란에 참여한 발해인들을 각 지역으로 이주시킨 것이다.<ref>{{서적 인용|author1=정병준|author2=권은주|author3=이효형|author4=바이건싱|author5=윤영인|author6=김위현|author7=왕위랑|authorlink=|title=중국학계의 북방민족·국가 연구|series=|publisher=[[동북아역사재단]]|isbn=9788961870566|page=234~23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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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인용문|병권과 전곡을 소유하는데 있어서 제일 먼저 여진에게 베풀었고, 다음은 발해, 다음은 거란, 다음은 한족(漢族)한인 순이었다}}<ref>《三朝北盟會編》卷98, 「靖康中帙七十三ㆍ諸綠雜記」 (上海古籍出版社, 2008), p.725.</ref>
 
그러나 발해인이 세력을 형성하여 통제의 어려움이 있을까봐 해마다 연경의 발해인을 수백 가(家) 단위로 산동으로 이주시킨 [[금 희종]]은 1141년에 이르러 발해인을 산동으로 모두 이주시켜 그들의 원망을 샀고<ref>《松漠紀聞》, 金人慮其難制,頻年轉戍山東,每徙不過數百家,至辛酉歲盡驅以行。</ref><ref>《契丹國志》, 至辛酉歲,盡驅以從,其人大</ref>, 1145년에는 중앙집권의 목적으로 한인과 발해인의 맹안모극을 폐지하였다.<ref>《金史》 兵志, 熙宗皇統五年,又罷遼東漢人、渤海猛安謀克承襲之制,浸移兵柄於其國人...</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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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후기에 발해인은 정치적으로 여진 통치자에게 배척을 받았으므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매우 약화되었다. 그러나 발해 상층인물과 여진 통치 집단의 갈등으로 인해 이들 양 종족이 서로 미워하지 않았으며 금 치하에서 발해인은 줄곧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발해인은 피지배층으로서의 한계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집단이 분산되어 다른 종족과 융합되거나 출신지역의 명칭으로 바뀌어 발해인이라는 족칭이 점차 사라졌다. 마침내 [[몽골제국]] 시기에는 극소수의 발해인이라는 족칭이 사적에 보이다가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ref name="나영남"/>
 
왕칭례(王承禮)는 [[금나라]] 후기에 발해족은 이미 한인(漢人)으로 간주되었다고 주장했다. [[원나라|원대]]의 몽골인 통치자들은 발해·[[거란]]·[[여진]]·북방 한족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한족(漢族)으로 대우하면서 "한인(漢人)" 혹은 "한아(漢兒)"라고 하였다. 이때 발해족은 "한인팔종(漢人八種)" 가운데 하나였으며, 발해족은 [[한족]]과 최후로 융합이 완성되어 빛나는 발해족은 이미 다시는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거나 명확하게 식별될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지만,<ref>王承禮, 《渤海的歷史與文化》, 53쪽</ref> 한인팔종(漢人八種)이라는 명칭은 원말의 도종의(陶宗儀)가 쓴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 1권 《씨족》에서 말하는 한인(漢人)은 결코 원래 [[금나라]] 경내의 [[한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종의(陶宗儀)가 말한 "한인팔종(漢人八種)"으로, 여기에는 [[거란]]·[[고려]]·[[여진족|여직]](女直)·죽인대(竹因歹)·출리활대(朮里闊歹)·죽온(竹溫)·죽역대(竹亦歹)·발해가 포함된다. 그리고 금나라에서 말하는 한인(漢人)은 바로 원래 [[요나라]] 경내의 한족만을 전적으로 가리켰다. 이밖에 또 설명해야 할 한 가지 점은 한인(漢人)이란 칭호는 금·[[원나라|카안 울루스]] 사람들의 습관적인 표현이었으며, 요나라 사람과 [[송나라]] 사람들은 한아(漢兒)로 통칭되었는 바, 이 양자는 완전히 똑같은 것으로 포폄의 색채가 없었기 때문에,<ref>劉浦江, 《遼金史論》, 遼寧大學出版社, 109쪽</ref> 발해인이 한족으로 통칭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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