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비발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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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조반니 바티스타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에게 음악의 기초를 배웠다. 아버지는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대성당 성가대의 바이올리니스트를 하기도 했다. 이후 레그렌치에게 작곡을 배웠다. 15세 신학교에 가 23살에 서품을 받았으나, 본디 몸이 약하여 숨이 차서 미사를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음악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그는 머리가 붉은 색이라 평생 '빨강 머리의 신부'라는 놀림을 받았다. 비발디는 [[1703년]]부터 [[1740년]]에 걸쳐 대체로 [[베네치아]]의 여자 고아원 겸 음악학교이던 피에타 고아원에 근무했으며 [[1716년]]에는 [[피에타]] 고아원 밴드부의 합주장(合奏長)이 되었다. 이 학원의 학생들의 오케스트라는 당시 [[유럽]]에서도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비발디는 마음껏 해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발디는 그 동안에도 자작한 [[오페라]]를 상연하기 위하여 [[이탈리아]] 각지를 순회하기도 하고 [[빈]]이나 [[암스테르담]]으로 가기도 하였다. [[1741년]]에 [[빈]]으로 간 비발디는 빈궁 속에 객사(客死)하여 그 곳 빈민묘지에 안치되었다. 이 때의 [[빈]] 방문 목적은 명확하지는 않으나 황제 [[카를 6세]]의 후원을 받으러 간 것으로 추측된다. 비발디의 이름은 그 후 아주 잊혀져 있었으나 대 [[바흐]]가 편곡한 작품이 계기가 되어 그 전모가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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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
== 주작품 ==
그의 작품은 [[오페라]]와 여러 곡의 교회 음악과 기악곡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바이올린]]을 주로 한 [[협주곡]]이 유명하며, 그 때까지의 악곡에 비하여 리듬이 활발하고 노래하듯 아름다운 선율이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독일]]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바흐]]는 그의 작품을 건반악기 연주용으로 편곡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신포니아 23곡, 합주 협주곡 <[[조화의 영감]]>,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4계> 등이 있다. 특히 <4계>는 표제 음악의 표본으로 불린다. 그는 약 500곡이나 되는 기악작품, 약 40곡의 [[오페라]] 외에 [[모테토]],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을 작곡했다. 작곡은 처음에는 [[베네치아]]나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으나 대부분은 수고(手稿) 형태 외엔 남아 있지 않다. 비발디는 무엇보다 우선 토렐리([[1658년]]~[[1709년]]), [[알비노니]]([[1671년]]~[[1750년]])들에 의하여 개발된 독주 [[콘체르토]]의 세계에서 안정된 양식을 확립시킨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 복수(複數)의 독주악기로 하는 [[콘체르토]]도 수없이 썼으나 이것은 대개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3악장으로 되었으며 전합주와 독주가 교대하는 [[리토르넬로]] 형식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