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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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발해 고왕<br>(渤海 高王)
|본명 = [[대조영]](大祚榮)
|다른 이름 = [[대조영|태조영걸걸중상]](太祚榮?)
|그림 =
|그림 크기 =
|대관식 = [[고왕]](高王)
|별명 =
|출생일 = [[645년]]?
|출생지 =
|사망일 = [[719년]](74세)
|사망지 =
|재위 = [[698년]]~[[719년]]
|매장지 =
|왕비 = [[연수영]](淵秀英)
|자녀 =[[발해 무왕|무왕]](武王)[[대문예]](大門藝)[[대창발가]](大昌勃價)<br>[[대호아]](大湖雅)[[대림]](大琳)
|부왕 = [[걸걸중상]](?)
|모후 = ?
|전임자 = ?
|후임자 = [[발해 무왕|무왕]]
|묘호 = [[고왕]](高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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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 [[발해]]
|연호 =
|목록 = [[발해의 역대 국왕|발해의 초대 태왕]]
}}
'''발해 고왕 대조영'''(渤海 高王 大祚榮, [[645년]]? ~ [[719년]] [[6월]] <small>재위</small>: [[698년]] ~ [[719년]] [[6월]])은 [[발해]]의 초대 [[가독부|왕]]이다.
 
[[발해]](渤海)에고왕에 관해 중국 측 기록인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발해]]말갈의 대조영(大祚榮)을 고구려의고(구)려의 별종 출신으로<ref>《[[구당서]]》([https://zh.wikisource.org/wiki/%E8%88%8A%E5%94%90%E6%9B%B8/%E5%8D%B7199%E4%B8%8B#.E6.B8.A4.E6.B5.B7.E9.9D.BA.E9.9E.A8 舊唐書]),「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ref> 서술했고, 반면 《[[신당서]]》(新唐書)에서 발해가 본래 고려(高麗)에 부속되었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라고 서술되어 있다.<ref>《[[신당서]]》([https://zh.wikisource.org/wiki/%E6%96%B0%E5%94%90%E6%9B%B8/%E5%8D%B7219#.E6.B8.A4.E6.B5.B7 新唐書]),「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ref>
고왕(高王)의 한국 측 기록인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인용된 《[[신라고기]]》(新羅古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대조영]](大祚榮)을 [[고구려]](高句麗) 장수라고 기록하였다.
 
한국 측 기록인 《[[삼국유사]]》에 인용된 《[[신라고기]]》와<ref>『三國遺事』 1, 기이 1, 말갈발해, “三國史云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孽類聚, 北依太伯山下, 國號渤海. …… 又新羅古記云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大伯山南, 國號渤海.”</ref>《[[제왕운기]]》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구장이라고 기록하였다.<ref>『帝王韻紀』 下卷, “前麗舊將大祚榮 得擧太白山南城 於周則天元甲申 開國 乃以渤海名.”</ref>
[[발해]](渤海)에 관해 중국 측 기록인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발해]]말갈의 대조영(大祚榮)을 고구려의 별종 출신으로<ref>《[[구당서]]》([https://zh.wikisource.org/wiki/%E8%88%8A%E5%94%90%E6%9B%B8/%E5%8D%B7199%E4%B8%8B#.E6.B8.A4.E6.B5.B7.E9.9D.BA.E9.9E.A8 舊唐書]),「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ref> 서술했고, 반면 《[[신당서]]》(新唐書)에서 발해가 본래 고려(高麗)에 부속되었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라고 서술되어 있다.<ref>《[[신당서]]》([https://zh.wikisource.org/wiki/%E6%96%B0%E5%94%90%E6%9B%B8/%E5%8D%B7219#.E6.B8.A4.E6.B5.B7 新唐書]),「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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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고구려 무장 ===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대조영에 관한 많은 견해가 표명되어 왔지만, 일반적으로 고구려인으로 보며 일부에서는[[퉁구스족]]인 [[말갈족]](여진족)으로서, 고구려에 복속된 뒤, [[고구려]]화 과정을 거친 말갈계 [[고구려]]인<ref>김기흥, 《발해의 종족적 연원》, 동북아역사논총-33, 2011, 437쪽</ref> 또는 [[송화강]] 유역에 거주하던 [[고구려]] 종족이라고도종족이라고 본다.<ref>노태돈, 《고대사산책 대조영, 고구려인인가 말갈인인가》 - 역사비평 1989-겨울호, 316쪽</ref> 대조영이 [[수나라]] [[개황]] 연간 [[돌지계]]가 이끌고 [[수나라]]로 귀부하여 유성에 정착하게된 [[속말말갈]]의 후손으로 보아, 그의 출자에서 고구려를 배제하는 학설도 존재한다.<ref>姚中岫(1979), 「海東 盛國-渤海史略」, 『牡丹江師院學報』 2期(『 高句麗渤海硏究集成』. 渤海 卷1, 哈爾濱出版社,  58~59쪽</ref>
 
7세기6세기 후반,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사망한 직후 그의 세 아들인 [[연남생]]·[[연남건]]·[[연남산]]의 권력 다툼을 벌였다. 결국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연남생]]은 [[당나라]]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하고 대조영은 고구려를 계승하는 국가를 건국하게 된다망명했다.
 
[[당나라]]는 [[667년]]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최고 권력자였던 [[연남생]]의 합류로 [[고구려]]는 크게 무너져 [[당나라]]는 파죽지세로 [[평양성]]은 으로 진격했다. 결국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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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부흥 운동과 발해 건국 ===
[[고구려]]가 멸망한 후 옛 [[고구려]] 영토에는 [[당나라]]가 통제하는 [[안동도호부]]가 세워지고, 남아있던 [[고구려]] 부흥 세력 또한 [[671년]] [[안시성]] 전투함락을 이후끝으로 와해되었다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대조영]]의 일가는 [[고구려]] [[차오양 시|영주]](榮州)로 이주했다. 그 이주의 계기가 강제였는지, 아니면 내투였는지 단정키 어려운 바이나,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각각의 동질성이 강하였던 것으로 보아, 이 두 집단은 영주에 속해예속되어 있을 때부터 집단적으로 [[당나라]]에 예속된, 곧 일종의 [[기미주]]와 같은 양태하에 처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ref>劉振華, 〈渤海大氏王室族屬新證《社會科學戰線》1981-3</ref><ref>崔茂藏 편역, 《渤海의 起源과 文化》, 藝文出版社, 1988</ref>
 
한편, [[696년]] 영주에서는 [[당나라]]의 지나친 억압 [[정책]]에 대한 [[거란]]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생겨난 혼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과 [[말갈]]의 [[걸사비우]]는 [[차오양 시|영주]]에서의 이탈을 감행했고, [[측천무후]]의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동쪽으로 이동,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의 추격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벌였다.
 
이때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죽고, 대조영은 남은 [[고구려]] 유민과 걸사비우의 말갈을 합병하여 이끌게 되었다. 대조영은 [[698년]]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의 추격군을 격파해 승리하고 읍루의 [[동모산]] [[지린 성]] [[돈화]] 부근)에서 [[발해]]를 건국하였다. 당의 북진 정책을 위협하던 [[돌궐]]과 손을 잡아 대당 견제세력을 구축했다.<ref>{{서적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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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세 ==
=== 국제 관계 ===
[[대조영]](大祚榮)은 [[705년]]에 당(唐)과당나라와 화친하였고, [[713년]], [[당나라]](唐羅羅)는 [[고왕]](高王)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座孝位大將君 渤海 君王) 홀한주도독부도독(忽汗州都督府都督)으로 명목상 책봉하였다. [[719년]], [[고왕]](高王)이 붕어한 뒤 그의 아들 [[발해 무왕|무왕]](武王)가 왕위를 이었다.
당나라는 [[발해]](渤海)를 고립시키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고왕]](高王)은 [[돌궐]](突厥)과 동맹 관계를 형성하며 고립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는 [[발해]](渤海)의 세력이 건국 초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해졌음을 의미한다.
 
[[700년]]에는 [[발해]](渤海)가 [[신라]](新羅)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신라]](新羅)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친밀한 것도 아니었다. [[신라]](新羅)의 유학자 [[최치원]](崔致遠)은 "발해(渤海)의발해의 왕인 [[고왕]](高王)이 [[신라]](新羅)와 수교를 맺고 싶어 사람을 보냈는데, [[신라 효소왕|효소왕]](孝昭王)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고왕]](高王)에게 [[대아찬]](大阿飡)이라는 관작을 하사하였다"라는 기록을 사불허북국거상장, 《[[동사강목]]》(東史綱目)은에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新羅)와 [[발해]](渤海)는 당시 몇 차례 교류가 있었으나 친선적인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는 양국이 그 무렵에는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아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라]]와 [[발해]]가 본격적으로 친선관계를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8세기 초반에 [[발해]](渤海)가 본격적으로 [[고구려]](高句麗)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양국이 사신을[[함흥]] 일대에서 직접 국경을 보내고접하면서 나서이다부터다.<ref>《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2001), 조이옥</ref>
 
== 가계 ==
* 아들 : [[발해 무왕|무왕]](武王, ? ~737, 재위:719~737)
* 왕비 : [[연수영]](淵秀英)
** 아들 : [[발해 무왕|무왕대문예]](武王, ? ~737, 재위:719~737大門藝)
** 아들 : [[대문예]]대창발가(大門藝昌勃價)
** 아들 : 대창발가대호아(大昌勃價湖雅)
** 아들 : 대호아대림(大湖雅)
** 아들 : 대림(大琳)
 
== 관련 작품 ==
== 대중 문화속에 나타난 고왕 ==
=== 드라마 ===
* 《[[삼국기]]》, [[KBS]], [[1992년]]~[[1993년]], 배우:[[임선택]]
* 《[[대조영 (드라마)|대조영]]》, [[KBS]], [[2006년]]~[[2007년]], 배우:[[최수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