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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가 처음 승은을 입은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숙종 19년([[1693년]]) 처음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고 그해 10월 6일 아들 영수(永壽)를 낳으나 영수 왕자는 두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신주기가 10개월 정도 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1692년 겨울 정도에 숙종과 인연을 맺고 1693년 1월 초에 임신한 것으로 본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해([[1694년]]) 숙종의 특명으로 종2품 숙의(淑儀)가 되었고<ref>《조선왕조실록》, 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6월 2일(무술) 1번째기사</ref> 그해 9월 13일 연잉군(延礽君) 금(昑)을 낳았는데 훗날 조선의 21대 임금인 [[조선 영조|영조]]이다. 숙종 21년([[1695년]])에 종1품 귀인(貴人)이 되었고, 숙종 25년([[1699년]])에는 [[조선 단종|단종]]의 복위(숙종 24년(1698년) 기념으로 정1품 빈으로 봉해지면서 숙(淑)이란 휘호를 얻어 숙빈(淑嬪)이 되었다.
 
숙종의 제1계비 [[인현왕후|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는 친분이 두터웠으며, [[인현왕후]]의 사후 [[조선 숙종|숙종]]에게 [[희빈 장씨]]의 저주굿을 발고한 것으로 알려졌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27년 신사(1701,강희 40) 9월23일 최종기사</ref> 그 후 희빈 장씨가 사사되기 하루 전에 숙종은 [[비망기]]를 내려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없다고 국법을 바꾸기에 이르었다. 숙종이 이와 같이 국법을 내린 것은 희빈 장씨와 같은 사례를 방지하고자 했다는 숙종의 의지였다고는 하지만 속내는 이미 서인의 영수로 떠올라 서인의 실세로 자리잡은 숙빈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희빈이 죽으면 영빈과 숙빈이 다음 중전 후보였는데 영빈은 명문가 소생에 자녀가 없다는 점에서 유리한 적합한 왕비 후보였고, 숙빈의 경우 출신이 미흡하여 결격사유가 되었지만 아들인 연잉군을 낳았고 서인들의 새로운 영수로 떠오른 여인이라 서인들의 세력을 발판과 지지를 기반으로 새로운 중전후보라 숙종입장에서는 노론세력의 지지을 받는 숙빈을 경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실제로 숙종은 내명부가 권력의 중심에 서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 숙종은 희빈 장씨 사사전 비망록을 내린 후 사사후에는 곧바로 처녀간택으로 새로운 중전후보를 찾기 시작하였는데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소론집안 출신의 여인 위주로 찾기 시작했다. 소론집안의 여식으로 찾는 다는 것 자체가 노론의 추존을 받는 숙빈을 경계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다음 해 5월에는 이현궁 토목공사에 3개월 이상이 걸린다는 상소를 무시하고 그대로 공사를 밀어붙여 완공에 맞춘 9월에는 중전 책봉을 완료하였고 10월에는 모든 후궁들의 품계를 높여주어 내명부를 새롭게 개편하였는데 이와 같은 절차들은 숙빈최씨를 내명부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숙종의 철저한 계산에서였다.
숙종의 제1계비 [[인현왕후|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는 친분이 두터웠으며, [[인현왕후]]의 사후 [[조선 숙종|숙종]]에게 [[희빈 장씨]]의 저주굿을 발고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27년 신사(1701,강희 40) 9월23일 최종기사</ref> 일각에서는 희빈 장씨 사후 숙빈 스스로 왕비가 되고자 했다고 말하지만 이는 신빙성이 없는 추측이다. 숙종이 후궁이 왕비가 되지 못한다는 국법을 만들지 않았다고 해도 숙빈은 다음 왕비 후보가 될 수 없었다. 숙종의 후궁 중에는 서인 명문가 출신인 [[영빈 김씨|귀인 김씨]]가 있었고, 만약 김귀인이 명문가 출신이 아닌 궁인 출신이었어도, 소생이 있는 숙빈 최씨가 왕비가 되면 차기 왕위계승서열에도 차질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빈 최씨, 귀인 김씨 모두 서인 세력이었고 서인에게 다음 정권이 돌아갔기 때문에 굳이 왕비가 되어야 할 사람이라면 자녀가 없는 명문가 출신인 귀인 김씨가 오히려 유리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숙종은 1702년 9월에 소론 집안의 중전 김씨를 책봉했고 10월에는 모든 후궁들의 첩지를 올려주어 내명부 개편작업을 하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숙빈의 궐 내에서의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 것으로 보이며 자신의 위치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숙빈은 이시기에 전후로 출궁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이현궁 출궁 후에도 숙종은 숙빈과 단 한번의 왕래도 없었고 암행을 나갈 때에도 이현궁을 항상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역대 임금들은 왕실 지친이나 오래도록 내명부의 후궁으로 있거나 총애가 깊은 후궁이 죽으면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를 했는데, 숙종은 숙빈이 죽었을 때 당시 [["제수를 넉넉히 보내고 예장하라"]] 는 말만 있었을 뿐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하지도 않았다. 또한 숙빈의 묘자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숙종은 두번이나 최씨를 일반인보다 못한 취급을 한 기록이 [[(숙종 44년 1718년 4월 20일1번째 기사, 숙종44년 1718년 4월 29일 1번째기사)]] 실록에 그대로 있는데, 이 기록만 보더라도 숙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숙빈은 두 내전을 모실 때,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게을리하지 않았고 모든 비빈이나 궁인을 접할 때 공손하고 온화하여 숙종이 마음 속으로 애중히 여겼다고 한다.<ref name="숙빈최씨 신도비淑嬪崔氏神道碑">숙빈최씨 신도비(淑嬪崔氏神道碑)</ref> [[인현왕후]]와 [[인원왕후]] 역시 특별한 대우를 했으나, 더욱 겸손하고 두려워하였고, 남의 장단점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아 옆에서 모시는 자들이 어쩌다 이런 일이 있으면 곧 꾸짖었다고 한다.<ref name="숙빈최씨 신도비淑嬪崔氏神道碑"/> 숙빈의 형제 중에 군문에 예속되었던 이들이 최씨가 왕의 후궁이 되자 직위를 사퇴하였는데, 숙빈이 조심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시켰다고 한다.<ref name="숙빈최씨 신도비淑嬪崔氏神道碑"/> 연잉군이 겨우 걸음을 배웠을 때에 숙종에게 나아가면 반드시 무릎을 모아 앉고 물러가라는 명 없이는 하루 해가 다 가더라도 어려워하는 빛이 없었는데, 숙빈은 연잉군이 오래 꿇어앉느라 발이 굽을까 염려하여 넓은 버선을 만들어서 힘줄과 뼈를 펼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keyword=%EC%9C%A0%EC%94%A8 영조 대왕 행장(行狀)]</ref> 그녀는 숙종의 후궁들 중 [[영빈 김씨]](寧嬪金氏)와 사이가 가까웠는데<ref>《조선왕조실록》, 영조 80권, 29년(1753 계유 / 청 건륭(乾隆) 18년) 8월 6일(무자) 1번째기사</ref> 영빈은 [[영조]]가 어릴 적 그에게 음식을 먹여주기도 했고<ref>《조선왕조실록》, 영조 51권, 16년(1740 경신 / 청 건륭(乾隆) 5년) 1월 9일(신해) 1번째 기사</ref> [[영조]] 또한 [[영빈 김씨|영빈]]을 어머니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ref>《조선왕조실록》, 영조 40권, 11년(1735 을묘 / 청 옹정(雍正) 13년) 1월 12일(계미) 1번째기사</ref>
 
숙종이 희빈 장씨 사사 후 계비가 입궁하기 전인 1702년 5월 숙빈을 궁 밖으로 출궁시켜버렸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숙종 30년(1704년) 4월17일자 기사에 '연잉군(延礽君)의 어머니 숙빈(淑嬪) 최씨(崔氏)는 이현(梨峴)에 갑제(甲第)가 있는데'라는 글이 등장한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30년 갑신(1704,강희 43) 4월17일 최종기사</ref> 숙종 재위 당시, 후궁으로 책봉되면 궐 밖에 사제를 지어 주는 것은 흔히 있던 일이었다. 숙종의 또다른 후궁 유씨([[소의 유씨]])는 숙원으로 책봉된 후 전택 매입에 소요되는 값이 6천 금(金)에 이르렀고,<ref>《조선왕조실록》, 숙종 32권, 24년(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년) 8월 2일(계묘) 2번째기사</ref> 숙원 박씨([[명빈 박씨]])의 궁에서도 강원도 춘천의 땔나무 터를 점유하는 일이 있었다.<ref>《조선왕조실록》,숙종 33권, 25년(1699 기묘 / 청 강희(康熙) 38년) 2월 27일(정묘) 1번째기사</ref> 때문에 대사간 이희무(李喜茂)는 '선왕조에서는 후궁의 제택을 별도로 두지 않았는데 정해진 제도를 준수하여 분에 넘치는 일이 없게 하라.'고 간언하기에 이르렀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39권, 30년(1704 갑신 / 청 강희(康熙) 43년) 5월 27일(을축) 2번째기사</ref>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숙종 37년(1711) 6월 22일 두번째기사 '옛날의 이현궁(梨峴宮)은 곧 지금의 숙빈방(淑嬪房)이다.'에서 숙빈방을 근거로 그전에 숙빈최씨가 궐을 나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또한 확실하지 않다.<ref name="ReferenceA">《조선왕조실록》, 숙종 50권, 37년(1711 신묘 / 청 강희(康熙) 50년) 6월 22일(경진) 2번째기사</ref> 조선왕조실록에 희빈장씨를 뜻하는 장숙원방이라는 표현이 나오며<ref>《조선왕조실록》, 숙종 18권, 13년(1687 정묘 / 청 강희(康熙) 26년) 12월 22일(병인) 1번째기사</ref> 숙종의 후궁인 귀인김씨도 김숙원방이라는 표현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42권, 31년(1705 을유 / 청 강희(康熙) 44년) 5월 2일(갑자) 1번째기사</ref> 또한 비변사등록 1708년 12월 30일 자료에 그때까지 궐을 나간적 없는 영빈김씨의 영빈방과 연령군방이란 표현이 존재하는것을 보아 숙빈방이란 표현은 단순히 숙빈최씨 소유의 자산 또한 창고를 뜻하는 바일 가능성이 크다.<ref>비변사등록 59책 숙종 34년 1708년 12월30일(음)</ref> 능원대군(綾原大君)의 옛 집인 이현궁(梨峴)은 최씨가 숙의(淑儀)였을때 그녀의 제택으로 정해졌는데,<ref>《조선왕조실록》, 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10월 7일(신축) 1번째기사</ref> 숙종은 처음에 이현궁(梨峴宮)을 최씨의 사제로 삼았다가 신묘년(1711년)에 그녀의 아들 연잉군의 제택으로 정하며 내사로 예속시켰다.<ref name="ReferenceA"/> 또한 영조는 숙빈 최씨가 1702년 궁 밖으로 출궁당했다는 설을 확실하게 부정하고 있으며,<ref name="숙빈최씨 신도비淑嬪崔氏神道碑"/> 임방이 지었다는 숙빈 최씨의 제문 역시 숙빈 최씨의 1702년 궁 밖 출궁설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ref>淑嬪崔氏喪。遣內侍致祭文。/ 水村集卷之六/應製錄</ref> 두 기록 모두 공통적으로 숙빈최씨가 말년에 궐에서 숙종을 간병했다고 하며 말년에 궁을 나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숙종은 1702년 9월에 소론 집안의 중전 김씨를 책봉했고 10월에는 모든 후궁들의 첩지를 올려주어 내명부 개편작업을 하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숙빈의 궐 내에서의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 것으로 보이며 자신의 위치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숙빈은 이시기에 전후로 출궁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이현궁 출궁 후에도 숙종은 숙빈과 단 한번의 왕래도 없었고 암행을 나갈 때에도 이현궁을 항상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역대 임금들은 왕실 지친이나 오래도록 내명부의 후궁으로 있거나 총애가 깊은 후궁이 죽으면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를 했는데, 숙종은 숙빈이 죽었을 때 당시 [["제수를 넉넉히 보내고 예장하라"]] 는 말만 있었을 뿐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하지도 않았다. 또한 숙빈의 묘자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숙종은 두번이나 최씨를 일반인보다 못한 취급을 한 기록이 [[(숙종 44년 1718년 4월 20일1번째 기사, 숙종44년 1718년 4월 29일 1번째기사)]] 실록에 그대로 있는데, 이 기록만 보더라도 숙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영조는 숙빈의 신분 상승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특히 소령원에 있는 기록과 신도비에 기록된 내용들은 영조에 의해 기록된 것인데, 여경방에서 태어났다고 기재한 내용도 그렇고 평생 어머니의 신분 컴플렉스에 시달린 영조가 어머니가 7살에 입궁했다는 내용을 기재한 것도 역사학자들도 고지고대로는 믿지 않고 있다. 고종의 주장한 침방나인 설도 고종이 영조의 직계후손이라는 이유로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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