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푸리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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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w-fourier.jpg|섬네일|샤를 푸리에]]
 
'''프랑수아 마리 샤를 푸리에'''({{lang|fr|François Marie Charles Fourier}}, [[1772년]] [[4월 7일]] ~ [[1837년]] [[10월 10일]])는 [[19세기]] 초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공상적 사회주의자]]이다. 그는 [[1837년]]에 [[여성주의]](feminisme)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철학자로도 유명하다.<ref>『Le Nouveau Monde amoureux』(사랑이 넘치는 신세계)에 등장</ref>
 
유복한 모직물 상인의 외아들로 프랑스 동부의 [[브장송]]에서 출생하였다. [[1791년]] 19세 때 [[리옹]]의 어떤 상사(商社)의 외무사원이 되었다. [[1793년]] 부친의 유산으로 리옹에서 상사를 차렸으나 [[프랑스 혁명]]의 소동으로 상품을 징발당하여 파산한다. 그 후에도 사용인으로서 상업실무에 관계하거나 중매인이 된다든가 하여 상업 투기의 기만성을 체험한다. 이 체험에서 사적 소유에 기초를 둔 상업의 무정부성이 그의 [[자본주의]] 비판의 요점이 되었다. [[1808년]]에 〈4운동의 이론〉을 발표하였고, 또 1822년 간행한 주저 〈농업가족집단〉(개정 증보판 〈보편적 통일의 이론〉1834년), 기타 저서와 논문으로 집단 소유에 입각한 파랑쥬라는 명칭의 공동조합 제도를 구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