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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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만세운동'''(六十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한국의 독립운동|독립운동]]이다.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인산일인 [[1926년]] [[6월 10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6·10 만세운동으로 명명되었다. [[1926년]]이 [[간지]]로 [[병인]]년이므로 '''병인만세운동'''으로 불리기도 한다.<ref name="두피디아">{{웹 인용|제목=6·10 만세운동[六十萬歲運動]|url=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55407|웹사이트=[[두피디아]]|확인날짜=2018-06-17}}</ref>
 
=== 준비 ===
6·10 만세운동은 [[3·1 운동]]을 잇는 전국적·전[[민중]]적인 [[한국의 독립운동|항일운동]]으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고, [[경성부]]에는 7000여 명의 육·해군을 집결시켰다. 주동자는 2차 조선공산당수 강달영, [[사회주의]]계의 [[권오설]], [[김단야]], [[이지탁]], 인쇄직공 [[민영식]], [[이민재]], [[연희전문학교|연희전문]]의 [[이병립 (1904년)|이병립]], [[박하균]], [[중앙고보]]의 [[이현상]], [[경성제국대학|경성대학]]의 [[이천진]], [[천도교]]의 [[박내원]], [[권동진]] 등으로, 이들은 10만장에 달하는 [[격문]]을 준비하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 (서울)|종로]]를 지날 때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했다.
 
=== 경과 ===
격문의 내용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채택,"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등이었다.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인산]]에 참가한 학생은 2만 4000여 명이었다. 군중의 호응으로 시위가 확대되었으나 조직 사이의 유대 결여와 민족진영의 조직약화, 노총계 사회주의계열의 사전체포 등으로 일본 경찰에 저지당하여 곧 실패하였다.
 
그러나 만세운동은 곧 전국으로 번져, [[고창]], [[원산]], [[개성]], [[홍성]], [[평양]], [[논산시|강경]], [[대구]], [[공주시|공주]] 등지에서 대규모의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 결과 ===
[[파일:송진우.gif|섬네일|왼쪽|120px|[[고하 송진우]]<br />(그는 [[정인보]]와 함께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유언을 위조하여 만세운동의 확산을 시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천여 명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을 비롯한 다수의 공산당원이 체포됨으로써 제2차 [[조선공산당]]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1927년]] [[신간회]]·[[근우회]]·[[신정회]]·[[연정회]] 등의 조선인 사회단체 조직과 [[1929년]] [[11월]]의 [[광주 학생 운동]](光州學生運動)에도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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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1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3·1운동 7주년 기념사 관련 항소에서 패소하고 곧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ref name="고하5"/> 이어 11월 ‘국제농민본부기념사’ 사건으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복역하였다가 [[1927년]] [[2월]] [[일본]] 신임 천황 [[쇼와 천황|히로히토(裕仁)]] 즉위기념 특사로 출옥하였다.<ref name="고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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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