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루: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위키문헌, 원문
5번째 줄:
[[후한]](後漢)에서 [[오호십육국 시대]] 사이에 [[연해주]]와 그 부근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한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ref>《[[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열전(東夷列傳) 제75</ref>
 
{{인용문|挹婁,古肅慎之國也。在夫餘東北千餘里,東濱大海,南與北沃沮接,不知其北所極。
{{인용문|
 
<br />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 [[부여]] 동북쪽 천여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닷가에 임하고 남으로는 [[북옥저]]에 접하며 가히 북쪽 끝은 알 수 없다. 땅은 산이 많고 험하며, 사람의 형상은 부여인과 닮았으나 그 말은 각각 다르다. 오곡과 베가 있고 붉은 옥이 나오고 담비가 좋으며 군장은 없으나 읍락 각각에 대인(大人)이 있다.
 
산림 사이에 살며 몹시 추우며 항상 토굴에 있어 깊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큰 집은 사다리 아홉 개에 이른다. 돼지 기르기를 즐겨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 기름을 두껍게 나누어 몸에 발라 이로써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벌거벗고 앞뒤를 베로 가린다. 사람 냄새가 많이 나고 더러움을 알지 못하여 변소를 가운데 짓고 그 주위에 산다.
 
[[한나라]]가 흥한 이후로 [[부여]]에 속하고, 무리는 비록 적으나 용력이 많고 산세가 험한 곳에 살고 또한 활을 잘 쏘니 능히 사람의 눈을 맞추었다. 활의 길이는 네 척이고 노와 같은 힘이 들고 화살은 싸리나무를 사용하고 그 길이는 일척팔촌이다. 푸른 돌을 화살촉으로 하고 촉에는 모두 독을 발라 보통사람은 즉사하였다. 편안히 배를 타고 도둑질을 좋아하니 이웃나라에서 두려워하고 근심하였으나 능히 복속시키지 못하였다. [[동이]]와 [[부여]]는 음식의 종류를 모두 조두그릇을 사용하는데, 오직 읍루만은 그렇지 않아 법과 풍속이 가장 기강이 없다.|後漢書/卷85/卷八十五·东夷列传第七十五/夫餘國}}
 
숙신과 여진 등은 유사한 어원을 가지는 명칭인데 반해 읍루는 계통을 알 수 없는 명칭인데, 이렇게 다른 명칭이 나타나게 된 이유에 대하여 숙신과 읍루가 같은 족계에 속한 씨족부락으로 주도권의 변화에 따라 명칭이 달라졌다는 견해<ref>幹志耿・孫秀仁, 『黑龍江古代民族史綱』, 黑龍江人民出版社, 1987</ref>, ‘동굴’이라는 뜻의 퉁구스 계통의 단어를 음차한 것이 읍루라는 견해<ref>趙展, 《皇太極所謂諸申的辨正》</ref>가 있다.
 
 
{{위키문헌|zh:後漢書/卷85#夫餘國|후한서 권85, 부여국}}
== 각주 ==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