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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파일:ManchuJurchen noblewoodblock ladies in 1900sprint.jpgpng|섬네일|250px|]]
'''여진'''({{llang|juc|[[파일:Jurchen.png|30px]]|}},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ᠵᡠᡧᡝᠨ}}|Jušen}}, {{문화어|녀진}}, {{zh|order=t|t=女眞|s=女真|p=nǚzhēn}})은 당시 [[백두산|백산]][[흑룡강|흑수]](白山黑水) 지역에 살던 모든 민족의 범칭(汎稱)이다. 여진이란 이름은 원래는 주리진(朱里眞)이었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여진이 되었다고 한다.<ref>徐夢莘, 《三朝北盟會編》 卷3, 所收的 「北風揚沙錄」</ref> 만주족은 오랫동안 여진족이라고 불렸다.
 
금대 여진은 국제발음구호로 주션(ʤu-çiɛn), 주션(ʤuʃiən) 등으로, n음이 탈락하면 주셔(ʤuʃə)로<ref>金光平·金啓孮,《女眞文辭典》118쪽</ref>, 청대 만주어로는 주션(ʤuʃən) 혹은 주션(ʤuʃiɛn)으로 그 발음들이 비슷하다.<ref>金光平 등, 《女眞語言文字硏究》, 문물출판사, 12쪽</ref>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은 말갈족이라고 불려왔으며 말갈(숙신)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 의해 정복되었으며 피지배민족으로서 고구려화되었으며 또한 발해에도 오랫동안 복속되어 있었다. 또한 여진족으로 명칭이 변했을 때도 고려와 조선의 수차례 걸친 여진 정벌로 여진족들은 고려와 조선에 조공을 바치며 복속되어 있었다. 조선은 여진족들을 당근과 채찍 즉 강경책과 회유책으로 다스렸다. 만주족은 청나라를 건국하기 이전까지 여진족이라고 불렸으며 여진족은 중국 한족(漢族)들을 유린하고 만주족으로 명칭을 변화시켰다.
 
별칭으로는 제신(諸申)·주신(珠申)·주선(朱先), 주리진(朱里眞)·주리진(朱理眞)·주이진(朱爾眞)''', '''주리차특(朱里扯特)·주아차척(主兒扯惕)·졸아찰대(拙兒擦歹)·주리흠(朱里欽)·주리선(朱里先), 여직(女直)·여정(女貞)·여질(女質)·려진(慮眞) 등이 있다.<ref>趙展,《皇太極所謂諸申的辨正》</ref><ref>李學智(1958), 「釋女眞」 上, 『大陸雜誌叢書』 1, 174쪽</ref>
 
'''주션'''(諸申,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ᠵᡠᡧᡝᠨ}}|Jušen}})이라는 족명을 자신들과 상관없는 [[시버족]]의 초오 머르건(超墨爾根,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Coo Mergen}})의 후예를 이르는 망령된 족명이라 주장하면서 금지하고, 주션의 족명을 '''[[만주]]'''(滿洲,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ᠮᠠᠨᠵᡠ}}|Manju}})로 개칭했다. 이후 유권점 [[만주문자]]로 기록된 사료들에서 여진을 주션 대신 여진의 명칭인 '''뇨이즈'''({{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ᠨᡳᠣ‍ᡳ<br />ᡷᡳ}}|Nioi Jy}})로 기재했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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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北重要民族乃是濊貊而非女眞.”</ref> 그리고 [[진위푸]]도 《금사》, 《문헌통고》, 《대금국지》 등의 기록을 좇아 단일종족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ref>金毓黻(1977), 『東北通史』, 洪氏出版社, 491쪽</ref> 그는 말갈의 계통에 대해서는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발해 → 여진·[[금나라|금]] → [[만주족|만주]]·[[청 제국|청]] → [[만주족|만족]]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했다.<ref>金毓黻(1941), 『東北通史』; 동북아역사재단 역(2007), 『김육불의 東北通史(上・下)』,
동북아역사재단, 87쪽</ref>
 
반대로 복합민족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일본 사학자 이나바 군진은 [[발해]] 유민과 [[흑수말갈]]을 여진이라고 한다고 하였다.<ref>稻葉君山 1969), 『滿洲發達史』, 大信印書館.</ref> 자오전지도 여진족계를 다원족으로 보고 있다. 그는 그의 논문 《여진족계고(女眞族系考)》에서 여진족계가 다원임을 주장하고 있다.<ref>趙振績(1975), 「女眞族系考」, 『史學集刊』 7, 187쪽</ref> 오국부는 흑수말갈에서 유래하며 생여진(生女眞)보다는 더 북쪽에 위치하며, [[요나라|요대]]에는 구별되지만 금대초기에 여진에 귀속되며 융합됐다고 한다.<ref>大貫精夫, 1999, 『東北アシア考古學-世界考古學』, 同成社. 227쪽.</ref> E.V.샤프꾸노프 박사는 오국부에 대해서 남쪽에 사는 여진족과는 언어, 의복, 집, 땅을 경작하는 방법이 다 달랐고, 오국성은 ‘다섯 나라의 도시’나 ‘다섯 영역의 도시’로 번역되는데, 이는 ‘다섯 도시’,‘다섯 지역’, ‘다섯 영역’을 의미하는 [[소그드]]인들의 ‘뻰쥐켄트’를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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Э. В. Шавкунов, А. Л. Ивлиев, Т. А. Васильева и др.(1996), 《Государство Бохай (698-926 гг.)》и племена Дальнего Востока России, 172~204쪽</ref>
 
여진족의 경제기구는 [[지리]]-[[기후]]적 요인을 포함하는 수많은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예를 들어, [[만주]] 평원의 남쪽지대에 거주한 여진의 경제기구는 북쪽의 퇴화된 흑토와 남쪽의 스텝 회토로 인해 기본적으로 [[목축]]-[[농업]]이었다. 경제적 관계에서 그들은 [[거란]]의 목축과 농경을중국의 하는농경인들을 중국인들을 지배하고 있던가진 [[요나라]]와 비슷하였다. 회색 염분 토양의 북동지역에 거주하거나 갈색 토양의 남동산악지역에 거주한 여진인들은 사냥과 물고기 잡이에 종사하였다. 그들의 농업으로의 이행이 어려웠던 것은 남만주 중국농업인들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차용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땅은 거름, 보다 깊게 갈기, 다른 농작물과 다른 윤작을 필요로 하였다.
 
그들의 농업은 수준이 높았는데, 쟁기 농업이 일반적이었고, 관개시스템이 뒷받침되었으며, 격자-둥지식의 옮겨심기 방법과 수전이 장려되었다. [[동진국]] 존속 시기의 여진 성들에 대한 다년간의 조사는 이 시기에 농업과 가축사육이 큰 주목을 받았고, 그리고 거의 모든 주거지에서 발견되는 농기구의 수량을 통해 볼 때에 이 분야의 생업이 일반적이었음을 판단할 수 있게 한다. 농기구 세트들은 그 유사성과 천편일류성이 놀라울 정도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동진의 국가기구가 많은 면에서 금나라의 복사판이라는 점으로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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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 ===
{{참고|여진어}}
[[만주족]]은 [[청 제국|청]]나라를 세우기 전에는 여진(女眞)으로 불렸다. 여진족은 12세기에 [[금나라]]를 세운 종족이지만, [[칭기즈 칸]]의 [[원나라]]에 망한 후 이른바 백산흑수(白山黑水), 즉 [[백두산]]과 [[흑룡강]] 사이의 넓은 지역에서 무리를 지어 살았다. [[명나라]] 말기에는 해서(海西), 건주(建州), 야인(野人)의 세 분파로 나누어져 명나라의 간접 통치를 받고 있었다. 16세기 말엽 건주 여진의 추장이었던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발흥하여 주위의 여진족 부족을 통합하고 17세기 초에 [[후금]]을 세운 후에도 여진이라는 명칭은 계속 사용되었다. 따라서 편의상 여진어는 여진족이 활동했던 12~16세기까지 기록된 자료에 나타난다. [[한자]]로 기록된 여진어의 당시 발음 대신 편의상 현대 중국음으로 비교해보면 이 음과 [[만주어]]음을 보아도, 여진어와 만주어는 같은 계통의 언어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두 언어는 아마 방언적 차이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진어와 만주어를 비교해보면 이 두 언어는 많은 부분 닮아 있어서 여진어를 만주어의 직전 선대 언어라고 보아도 좋으며, 16세기 후반 시작한 만주어를 좁은 의미의 만주어라고 한다면, 12~16세기의 여진어를 포함하여 만주 지역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이전 언어들을 넓은 의미의 만주어라고 부를 수 있다.<ref>{{서적 인용|author1=윤은숙|author2=연규동|author3=장준희|author4=최준|author5=김선자|author6=김정열|author7=장석호|author8=박소현|author9=김주용|authorlink=|title=만주 이야기|series=|publisher=[[동북아역사재단]]|isbn=978-89-6187-305-5|page=85~87}}</ref>
 
여진어는 두 종류의 여진 문자로 기록되었다. 1119년에 금 태조 [[완안 아골타]]의 명에 따라 완안 희윤(完顔希尹)이 한자와 [[거란 문자]]를 본따 만든 문자를 여진대자(女眞大字)라고 하며, 이후 1138년에 [[금 희종]]이 여진대자를 간소하게 만들어 사용하게 한 문자를 여진소자(女眞小字)라고 한다. 여기에서 [[한족]]의 문화에 맞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려 했던 여진족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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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여진 ==
[[조선]] [[함경도]] 북부에 거주하던 조선 귀화 여진족은 [[한민족]]에 동화되었는데, [[20세기]] 초까지 [[재가승]]이라는 이름으로 여진족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가진 종교집단이 존재하였다존재하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들은 1960년대에 [[한민족]](韓民族)에 완전 흡수되었다.<ref name="Hwansoo">{{저널 인용|author=Kim Hwansoo|date=2013|title='The Mystery of the Century:' Lay Buddhist Monk Villages (Chaegasŭngch'on) Near Korea's Northernmost Border, 1600s–1960|url=http://s-space.snu.ac.kr/bitstream/10371/93058/1/02.pdf |journal=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volume=26|issue=2|pages=297–299|access-date=April 24, 2016}}</ref>
 
==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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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보기 ==
* [[중국여성의 해외성매매]]
* [[금나라]]
* [[후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