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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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후 도민들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다른 지역과 달리 [[미군정]]청과 협조적이었다.<ref name="서중석">《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서중석 (역사학자)|서중석]] 저.p80~p82</ref>
그러나, [[1947년]] 제주 북초등학교 [[3.1절]] 기념식에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본 시위군중들은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발포사건의 전모를 모르던 미군정 당국은 이 발포사건을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사건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짓고 3
3월 10일부터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발생하여, 제주도의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행정기관 대부분인 23개 기관, 105개의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등 제주 직장인 95%에 달하는
[[1947년]] 3월 19일 미군정 정보 보고서에서는 미군정은 제주도 주민 70%가 좌익 또는 그 동조자로 인식했다. [[박헌영]]의 비서 [[박갑동]]은 어느 정도 지지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ref>[http://www.kbs.co.kr/1tv/sisa/war/program/ KBS 한국전쟁 10부작]</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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