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 (일본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8,899 바이트 추가됨 ,  7개월 전
== 역사 ==
=== 가마쿠라 시대 ===
[[헤이안 시대]] 후기에 이르러 일본 국내의 치안유지 등을 위해 고쿠시가 힘 있는 재지(在地) 무사를 고쿠가(國衙) 소속의 고쿠슈고닌(国守護人, 슈고닌守護人)으로 임명하였다는 견해가 있고, 여기에 따르면 헤이안 시대 후기에 고쿠슈고진이 가마쿠라 시대 슈고의 기원이 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가마쿠라 시대의 슈고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지쇼 4년([[1180년]]) 10월 후지 강의 전투(富士川の戦い) 직후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가이 겐지(甲斐源氏)의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義)를 스루가 슈고(駿河守護)、야스다 요시사다(安田義定)를 도토미 슈고(遠江守護)로 임명하였다는 《[[아즈마카가미]]》(吾妻鏡) 10월 21일조 기록이다. 이 단계에서는 요리토모의 세력이 아시가라(足柄) 서쪽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아즈마카가미의 편찬자에 의한 곡필로 생각되지만, 요리토모의 세력권이었던 간토 남부에서는 일찍부터 설치되어 있었다고 생각되고 있다.<ref>조겐(承元) 3년([[1209년]])에 슈고의 직무 태만이 문제가 되어 막부는 조사를 위해 가마쿠라 인근 구니의 슈고에게 보임하문(補任下文) 제출을 명하였다. 이 무렵 지바 나리타네(千葉成胤)는 그의 할아버지 쓰네타네(常胤)、미우라 요시무라(三浦義村)는 아버지 요시즈미(義澄)가 하사받았던 요리토모의 하문을 제출하였고, 지바 쓰네타네와 미우라 요시즈미가 요리토모로부터 시모우사 슈고(下総守護) ・ 사가미 슈고(相模守護)로 임명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아즈마카가미》 조겐承元 3년 11월 20일、 12월 15일조). 《겐페이 성쇠기》(源平盛衰記)에는 후지 강 전투 이후에 히로쓰네와 쓰네타네가 시모우사 ・ 가즈사를 요리토모로부터 받았다는 기술이 있어, 가즈사노 히로쓰네도 가즈사 슈고에 임명되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ref> 그 뒤 요리토모 정권의 세력이 서상(西上)함에 따라 슈고의 설치는 사이고쿠(西国)로까지 확대되기에 이른다. 당시의 슈고는 소쓰이부시(惣追捕使)라고도 불리며, 국내의 병량 징발이나 병사 동원 등을 주요 임무로 삼고 있었다. 가지와라노 가게토키(梶原景時)와 도이 사네히라(土肥実平)는 하리마(播磨) ・ 미마사카(美作) ・ 비젠(備前) ・ 빗추(備中) ・ 빈고(備後) 5개 구니의 소쓰이부시로 보임되어(《아즈마카가미》 겐랴쿠 원년 2월 18일조), 미나모토노 노리요리(源範頼)의 군과 함께 헤이케 추토에 참가하였다. 겐랴쿠(元暦) 2년([[1185년]])에 헤이케가 멸망하고 추토가 종료되고, 요리토모는 [[고시라카와 천황|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에게 여러 구니의 소쓰이부시를 정지할 것을 아뢰었다(《햐쿠렌쇼》百錬抄 6월 19일조).
 
같은 해 11월 [[호조 도키마사]](北条時政)의 주청으로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 ・ 미나모토노 유키이에(源行家)의 추토를 목적으로 고키(五畿) ・ 산인(山陰) ・ 산요(山陽) ・ 난카이(南海) ・ 사이카이(西海) 5개 도의 여러 구니에 구니지토(国地頭)를 설치한다는 칙허가 나왔다(분지 칙허文治の勅許). 구니지토에는 장원(荘園) ・ 고쿠가령(国衙領)에서 단별(段別) 5되의 병량미 징수와 전지 지행권(知行権) ・ 구니 내의 무사의 동원권 등 강대한 권한이 주어졌는데, 장원영주의 반발을 사서 이듬해 3월에 정지되었고 도키마사는 군사 ・ 검단(検断) 관계를 직무로 하는 소쓰이부시의 지위만을 유지하였다(《아즈마카가미》 3월 1일, 2일, 7일조). 나아가 유키이에나 요시쓰네 당여가 차례대로 추토되면서 6월에는 기나이 주변 구니에서 소쓰이부시가 정지되었다(吾妻鏡』6月21日条). 조정은 소쓰이부시에 대해서 「世間落居せざるの間」(아즈마카가미 3월 7일조)라고 유보조건을 붙여서, 이 시기의 슈고는 전시나 긴급 상황에 임시로 군사지휘를 맡고 평시로 돌아가면 정지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식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요리토모의 여러 구니에서의 슈고권(守護権)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겐큐 2년([[1191년]]) 3월 22일의 겐큐 신제(建久新制)에 따라 항구적인 제도로 바뀌어, 여러 구니마다 설치된 직책은 슈고、장원 ・ 고쿠가령에 설치된 직책은 지토로써 구별되어 가마쿠라 시기의 슈고 ・ 지토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게 된다. 당초의 요리토모 정권의 실질적인 지배가 미치는 지역은 일본 동쪽 거의 절반 정도에 한정되어 있었고<ref>사학자 호타테 미치히사(保立道久)는 《아즈마카가미》 분지 2년 6월 21일조는 기나이 ・ 사이고쿠의 슈고 ・ 소쓰이부시는 완전히 정지되었음을 의미하고 겐큐 신제의 이행도 그 상태가 계속된 결과 요리토모가 최종적으로 슈고를 설치한 것은 「東国二十八ヶ国」에 한정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 슈고가 설치된 「도고쿠 28개 구니」(東国二十八ヶ国)는 《아즈마카가미》 겐닌(建仁) 3년 8월 27일조에서 [[미나모토노 요리이에]](源頼家)가 아들 이치만(一幡)에게 넘겨주려고 했던 구니와 합치한다고 보았다(保立道久 『中世の国土高権と天皇・武家』(校倉書房、2015年)第6章 鎌倉前期国家における国土分割 (原論文:2008年))。</ref> 기나이 서쪽 지역에는 [[고토바 천황|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을 중심으로 하는 조정이나 지샤(寺社) 세력이 강해서 고토바 상황의 명으로 슈고직이 정지되고, 오우치 고레요시(大内惟義, 히라가 도모마사平賀朝雅의 친형)가 기나이 주변 7개 구니의 슈고로 보임되는 등 간섭 정책이 계속 시행되었다. 이러한 간섭을 배제할 수 있게 된 것은 조큐의 난 이후였다.
 
그 뒤 슈고의 직무 내용이 차츰 명확해져갔고, 조에이(貞永) 원년([[1232년]])에 제정된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에서 슈고의 직무는 군사 ・ 경찰적인 직무인 대범(大犯) 3개 조의 검단(고케닌의 의무인 가마쿠라 ・ 교토에서의 오반야쿠大番役의 재촉、모반자에 대한 수색 및 체포, 살해 범죄자의 수색 및 체포)과 오반야쿠의 지휘 감독에 한정되었고, 고쿠시의 직권인 행정에 대한 관여나 고쿠가령의 지배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슈고가 국내의 지토나 재청관인(在庁官人)을 가신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은 존재했고, 이러한 슈고에 의한 재지 무사들의 가신화는 차츰 무로마치 시대에 한 층 더 진전하게 된다.
 
가마쿠라 시대 중기 이후에는 호조 일문에 의한 슈고직의 독점화가 진행되었다. 이것은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 무렵부터 호조 본가(도쿠소得宗)에 의한 정치의 전제화, 다시 말해 도쿠소 전제(得宗専制)가 확립됨에 수반한 것으로 호조 일문의 슈고고쿠(守護国)는 가마쿠라 초기인 [[1200년대]] 무렵에 2개 구니(다른 집안 36개 구니, 슈고가 설치되지 않은 곳은 4개 국<ref>야마시로(山城, 교토 슈고京都守護 ・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 야마토(大和, 고후쿠지興福寺 지배), 이즈미(和泉, 고토바 상황 지배), 에치젠(越前), 기이(紀伊, 고토바 상황 지배)</ref>), [[1250년대]] 무렵에는 17개 구니(다른 집안 24개 구니、설치되지 않은 곳은 5개 구니<ref>야마시로, 야마토, 사가미(相模, 사무라이도코로侍所 ・ 만도코로政所 관장), 에치젠, 기이</ref>)、1285년대 무렵에는 33개 구니(다른 집안 18개 구니, 설치되지 않은 곳은 5개 구니<ref>야마시로, 야마토, 셋쓰(摂津, 로쿠하라 단다이), 단바(丹波, 로쿠하라 단다이), 히젠(肥前, 진제이 단다이鎮西探題 겸임)</ref>)、가마쿠라 막부 멸망 직전인 [[1333년]]에는 38개 구니(다른 집안 15개 구니, 설치되지 않은 곳은 5개 구니<ref>야마시로, 야마토, 하리마(播磨, 로쿠하라 단다이), 히젠</ref>)와 가마쿠라 시대 중기를 경계로 한꺼번에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다른 고케닌들의 불만이 쌓이는 결과를 초래해,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 무로마치 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