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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고려||918년~1392년에 존재했던 나라}}
{{고구려 표}}
'''고구려'''(高句麗)는 한국의 고대 국가 중 하나로, [[백제]] 및 [[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를 구성한 주요 국가이다. 그 영토는 [[만주]]·[[한반도]] 북부, 그리고 [[러시아]]의 [[연해주]] [[몽골]] 동부까지<ref name="다리강가"/>남부에 걸친 나라로 약 700년 동안 존재하였다. 5세기 [[장수왕]] 때 국호를국호가 '''고려'''(高麗)로 바꾸었으나변화했으나, [[고려 태조|왕건]]이 건국한 [[고려|같은 이름의 왕조]]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통칭되고 있다.
 
고구려는 그 전성기에 [[한반도]] 북부와 중부 일대, [[요동반도]]를 포함하는 현 중국의 [[동북 3성|동북 지역]] 및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일대, [[만주]] 지역까지 영토로 두었으며 최근에는 [[몽골 다리강가 유적]]이 발견되어 몽골 동부까지 지배한 것으로 알려졌다두었다.<ref name="다리강가">두산백과,[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165764&cid=40942&categoryId=34039, 몽골 다리강가],2009년.</ref><ref>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99094</ref><ref>중국의 [[동북삼성]]과 [[내몽골]] 동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통틀어 [[만주]]라고 한다.</ref> 또한고구려는 [[요동]]·[[베이징다양한 시|유주]](현 베이징)·[[랴오허 강|요수종족]] [[한족|한족·]][[거란]]·[[돌궐]]·[[말갈]](여진족)·[[선비족|선비]]·지두우(몽골족)<ref>정확히는문화권을 중국아우른 문헌에제국적인 병합하려속성을 했다는가진 기록이 존재함나라였다.</ref> 등을 정복하고 통치한 나라이다[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17/12/20883/ 또한고구려는 갈석산(제스 산)과평양으로 싱안링산맥(흥안련산맥),천도했을까 아무르강과- 쑹화강,매경프리미엄 연해주를 모두 포함한 대제국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매일경제]</ref>
 
[[광개토대왕릉비|광개토태왕비(好太王碑)]]에는 고구려의 시조 추모(주몽)가 "천자(天帝)의 아들"(天帝之子, 天帝:하늘의 황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고구려는 천손국가(天孫國家)였고 중원 고구려비에서 볼수 있듯이 "태왕"(太王)이라는 독자적인 칭호와 연호(年號)를 사용했고 "동맹"이라고 부르는 하늘에 제사(天祭)를 지내며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국가들의 경우 주변 국가는 모두 천자의 신하라고 부르고 기록하며 "천자"라는 단어의 사용을 사용하면 항의를 하였고 제후국의 제후들은 부모인 종묘와 땅과 농사의 신인 사직(社稷)에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심하게 항의하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천손국가(天孫國家)를 주장한 것은 오직 고구려만이 제후국들을 거느리는 "천제(天帝)의 국가"라는 뜻이다. 이민족의 북조와 중국인들의 남조는 대략 1~2세기면 멸망한 것이 많지만 고구려는 광활한 영토와 복속된 여러 민족들을 성공적으로 지배하고 7세기 동안 하늘에 제사를(天祭) 이어가며 동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하였다.
 
== 국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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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성립 ===
고구려는 동부여의[[동부여]] 금와왕의[[금와왕]]의 양자라 전해지는 추모[고주몽]를 중심으로하는 삼국사기의 건국설과 졸본부여 시절의 동명성왕의 건국설이 있다. 주로 한나라와 [[부여]], 고대 군소 국가들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초기의 중심지인 산간지대를 수도로 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전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흡수하는 적극적인 정복 전쟁을 벌였고 북쪽은 북부여가 있고 동쪽은 동부여가 있어 주로 단군조선[고조선] 고토 회복 운동 대의명분으로 요동, 요서 방향을 공략하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초기 유리명왕 시절의 [[신나라]]를 공격했다. <ref>왕망王莽 제위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장우 (신)|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 -후한서 고구려전</ref> 하고 있으며, 고구려본기의 내용 또한 중국사서의 기초를 두고 있어 유사하나 고구려후 추가 아닌 장수 연비(延丕)가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후 고구려는 6대 태조태왕 이후 절대 왕족인 중앙의 [[계루부|고씨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초기 왕족인 [[소노부|해씨 소노부]](消奴部) 왕비 배출 부족인 북부의 [[절노부]](絶奴部) 동부의 [[순노부]](順奴部) 남부의 [[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ref>오녀산성</ref>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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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고구려-위 전쟁}}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고구려와 [[위 (삼국)|위]](魏)나라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위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하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ref name=AAA>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깨진 링크|url=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 }}</ref>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을 정복하는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낙랑을 함락시키고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을 정복함으로서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