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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고려||918년~1392년에 존재했던 나라}}
{{고구려 표}}
'''고구려'''(高句麗)는 한국의 고대 국가 중 하나로, [[백제]] 및 [[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를 구성한 주요 국가이다. 그 영토는 [[만주]]·[[한반도]] 북부, 그리고 [[러시아]]의 [[연해주]]
고구려는 그 전성기에 [[한반도]] 북부와 중부 일대, [[요동반도]]를 포함하는 현 중국의 [[동북 3성|동북 지역]] 및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일대, [[만주]] 지역까지 영토로
[[광개토대왕릉비|광개토태왕비
== 국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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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성립 ===
고구려는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주몽|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 (사서)|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ref>오녀산성</ref>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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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고구려-위 전쟁}}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고구려와 [[위 (삼국)|위]](魏)나라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위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하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ref name=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을 정복하는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낙랑을 함락시키고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을 정복함으로서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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