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석 (190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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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의 소개로 그는 만주 봉천성 유하현에 있던 신흥군관학교에 도착, [[김광서]](金光瑞), [[신팔균]](申八均), [[지청천]](地靑天)을 만났다. [[1919년]] 가을부터 [[1920년]] [[만주]]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ref name="mbc 라디오 프로그램 격동 50년" /> 근교의 [[장작림]] 군벌의 영향으로 일본의 간접적 압력을 받아 고충이 심했다.
 
'''[[1920년]] 이범석은 길림성(吉林省)의 왕청현(汪淸縣)에 도착,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담하여 중대장으로 [[청산리 대첩]]에 참전'''했고참전했고 이어 사령관이 되었다.<ref name="mbc 라디오 프로그램 격동 50년" /><ref name=" http://www.opm.go.kr">[http://www.opm.go.kr/warp/kr/morgue/old_pm/01_01.html http://www.opm.go.kr]</ref> 그해 초 그는 북로군정서의 무기 구입을 담당하였는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러시아]]를 떠나 자국으로 귀국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 [[체코]] 군대가 각자 자기가 소지한 무기를 팔겠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자신의 전재산과 교포들의 모금과 모금결사대의 활동의 성과로 체코군으로부터 다량의 탄환과 소포, 중기관총, 포탄, 화약 당을 사들였다. 무기를 대량으로 구매한 뒤 그는 사관생도들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1920년]] 봄 그는 소수의 병력으로 마적과 합세하여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 일본군의 러시아군 대토벌 작전을 입수했다. 일본군 13사단과 14사단은 러시아 군의 포로가 된 체코군을 석방한다는 구실로 남으로 진군하였고, 21사단은 토문강을 건너 북상하였다. 만주철도수비대는 송화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군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