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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제국주의: 산업화를 통해 자본주의가 된 국가들은 자본주의의 특성인 공급과잉 문제에 필연적으로 봉착하였다. 공급과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장의 개척이 필요했고, 시장을 개척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식민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거쳐 일본의 막부 체제가 종식되고 천황에 의한 중앙집권적 통치가 이루어지면서, 열강들의 기술,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산업화가 본격화 되었다.일본은 다른 국가와 같이 산업화가 본격화 됨에 따라 자본주의가 들어섰고, 이는 공급과잉의 문제를 낳았다. 다른 열강들이 식민지를 차지했던 것과 같이 일본 또한 똑 같은 선례를 따르며 제국주의화가 되었다. 일본의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바로 조선의 식민지화인 것이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의 일환으로 탈아입구를 외치던 [[일본 제국]]은 [[조선]]이 수교를 거부하자 이를 명분으로 [[사이고 다카모리]]가 한반도 침략을 위한 [[정한론]]을 제기하였다. 또한 당시 [[제정 러시아]]는 남하 정책으로 [[한반도]] 진출을 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혼자 이에 맞설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일본은 인접 지역이 다른 열강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1930년도 박현빈이 바보가 되었다. 카이사를 못하는 현빈!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의 권력 다툼 때문에 초기에는 친일 개화파를 지원했지만, [[김옥균]] 등이 실권을 잡으려는 이번에는 청나라 병력을 사용하여 탄압했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 이번에는 러시아를 끌어 들여 일본 세력을 견제하려고하는 등 국익증진 보다는 세력다툼에 바빴다.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장악하기 위한 장기적 계획을 수립하였고, 1894년 [[청일 전쟁]]과 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가시화했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그 외에도 주권국인 [[대한제국]]의 국권을 무시하고, [[영일 동맹]] 및 [[태프트-가쓰라 밀약]] 등의 조약을 체결하며, 한국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일제는 [[1905년]] [[11월 17일]] 무력을 동반한 [[을사조약|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침탈한 데 이어 [[한일신협약]]과 [[기유각서]] 등으로 대한제국의 배타적 권리를 점점 흡수하였다.(이 시기의 자세한 역사는 [[대한제국]]이나 [[개화기]] 등의 항목을 참조). 국내에서는 [[일진회]]와 [[이완용]]이 [[한일 합방]]에 협력했다.
 
[[1909년]] 7월에 한국의 흡수가 일본 내각에서 결정되었고, 이후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명분삼아 일본 내에서 제국주의자들의 한국 합병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져 오히려 병합의 추진이 가속화되었다. [[윤치호]]도 당시 이를 두고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한일 합방]]을 더욱 촉진시켰다."<ref name="yun133">윤치호, 《윤치호일기 1916~1943: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 시기》 133페이지</ref> 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대한제국의 황제]]를 '왕'으로 낮추어 불렀다. 결국 한반도 지역 전체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식민 정부인 [[조선총독부]]에 의해 1945년까지 35년간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 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