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교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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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다. ====
[[19세기]] 말엽 [[조선]]에 들어와 있던 [[러시아 제국]] 군인 약 90명과 민간인 약 30명은 러시아 공사관에 모여 [[성직자]] 없이 주일과 축일에 기도와 찬양으로 [[성사]]를 대신하면서 생활했으나, 사제가 없어 태어나는 자녀들에게 [[세례]]할 수가 없었고 [[성체성혈성사]]로써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받을 수가 없었으며 죽은 사람을 [[장례]]할 수가 없어 주조선 러시아 공사관 직원 폴랴놉스키는 [[1897년]] [[1월 3일]] 본국에 [[조선]]에서 사목할 성직자를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1897년]] 7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던 [[러시아 정교회]] 신성종무회의가 한반도 선교를 결정해서 소규모 선교회가 조직돼 [[1897년]] 안에 한반도에 입국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열강이 치열하게 각축하던 상황이었기에 입국은 지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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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러 조선인 신자들. ===
한편 조선 말기인 19세기에 적잖은 조선인이 [[삼정의 문란]]에 따른 궁핍과 기아를 피해 국경을 넘어 러시아의 [[연해주]] 일대에 정착해 체류하기 시작했다. 실제 1880년 러시아 사람이 연해주에서 사는 조선사람들이 쓰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한글과 러시아말로 쓴 이중어[[사전]]을 출간했으며, [[독립운동가]]인 [[최재형]] 선생도 [[1867년]] 러시아 연해주로 이민한 조선사람의 아들이다 . 러시아는 연해주에서 살던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 일제 강점기 ===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를 점령한 [[일본 제국]]은 한국 주재 러시아인들에게 강제 출국을 명령했고, 그중에는 선교회도 포함되어 있었다.
러일 전쟁 종전 후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사업은 [[1906년]] 한반도에 입국한 대수도사제 파벨 이바놉스키(Павел Ивановский)에 의해 재시작됐다. [[1906년]]에서 [[1912년]]까지 한반도에 체류하던 파벨 이바놉스키(Павел Ивановский) 신부는 [[러일 전쟁]] 당시 전몰한 러시아 장병을 추모한다는 명분으로 성당 건립을 추진하려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무산된 데다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가 공산화하면서 정교회가 박해에 처하게 돼, 러시아 정교회는 조선에 있는 정교회를 더 이상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1922년]] [[2월 26일]] 러시아 정교회 조선 선교회는 [[일본 정교회]]의 러시아인 수장 세르기 티호미로프 대주교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교회 교리를 교습받은 제1기생 중에서 강탁(요한) 신부가 배출되어 최초의 한국인 정교회 성직자가 되었다. 강탁(요한) 신부는 1912년 일본 정교회의 도쿄
=== 해방과 한국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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