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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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상자 한국 전쟁}}
 
'''한국 전쟁'''(韓國戰爭, {{표준어|6·25 전쟁, 한국 전쟁}}<ref>[[대한민국]]에서는 1973년 제정한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 '''6·25 사변일'''(六二五事變日)을 공식 명칭으로 써왔으나, 2014년 3월 24일 개정으로 '''6·25 전쟁일'''이라고 규정한다. 또는 '''6·25 사변''', '''6·25 동란''', '''6·25 전쟁'''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으로도 부른다. 대한민국의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6·25 전쟁으로 표기했는데, 이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따른 것이며, [[대한민국]]에서는 공식적으로 '''한국 전쟁'''보다 '''6·25 전쟁'''을 사용한다.</ref>, {{문화어|조선 전쟁/조국해방전쟁}}<ref>[[중화인민공화국]]의 [[조선족]]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ref>, {{llang|en|Korean War}}, {{llang|zh-hant|朝鲜战争韓戰/抗美援鮮戰爭}}, {{llang|ru|Корейская войн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이다.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하여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비화될 뻔 하였으나,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휴전 이후로도 현재까지 양측의 유무형적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반공 양강 진영으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열전으로 폭발한 대표적 사례로,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었으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다. 이는 [[국제연합군]]과 의료진을 비롯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까지 관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국제전이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현대사회의 발달/시련과 민주주의의 발전/6·25전쟁#6·25전쟁〔槪說〕|6·25전쟁〔槪說〕]]〉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자유 양대 진영으로 다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내포한 갈등이 폭발한 것으로서,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으며.."--></ref>
 
미리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과 [[소비에트 연방]] [[이오시프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은 [[김일성]]은<ref>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어 [[스탈린]]과 [[김일성]]의 긴밀한 협의 아래 전쟁이 일어났음이 확인되었다.</ref> 어 1950년 6월 25일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38선 이남으로 진격하였다. [[조선인민군]]의 대공세에 [[유엔]]은 [[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한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다. 그리하여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ref>{{뉴스 인용|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8190032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08-19&officeId=00032&pageNo=2&printNo=2977&publishType=00020|제목 =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날짜 = 1955-08-19|출판사 = 경향신문|인용문 = <!-- 이와 반면에 북한괴뢰는 치밀한 계획하에 남침을 기도하고 드디어 1950년 6월 25일 未明 괴로군을 북위 38도선 및 동해안 沿線 11개소로부터 대거 대한민국에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어 7월7일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國聯연합군이 조직되었고 --> }}</ref>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ref>{{뉴스 인용|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8190032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08-19&officeId=00032&pageNo=2&printNo=2977&publishType=00020|제목 =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날짜 = 1955-08-19|출판사 = 경향신문|인용문 = <!-- 한편 대전을 넘어선 괴뢰군은 호남평야를 휩쓸고 서남해안 沿邊으로 침입하는 한편 ... 이리하여 한미연합군은 ... 워-커라인(부산반월형진지)를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