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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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국'''({{zh-stp|t=大淸國|p=Dàqīngguó}}, {{llang|mnc|{{MongolUnicode|ᡩᠠᡳᠴᡳᠩ<br />ᡤᡠᡵᡠᠨ}}|Daicing Gurun}}<ref group="주">[[1819년]], 미상의 편찬자가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실록을 필기체 [[만주문자]]로 번역한 《Taidzu Dergi Hūwangdi i Ben Gi Bithe》에는 '''암바 칭 구룬'''({{llang|mnc|{{MongolUnicode|ᠠᠮᠪᠠ<br>ᠴᡳᠩ<br />ᡤᡠᡵᡠᠨ}}|Amba Cing Gurun}})으로 표기했다.</ref>, {{llang|mn|{{MongolUnicode|ᠳᠠᠶᠢᠴᠢᠩ<br />ᠤᠯᠤᠰ}}|Dayičing Ulus}}, [[1616년]]<ref>Crossley, Pamele K.(2009), “The Influence of Altaicism on East Asian Studies", 194~196쪽.</ref> 또는 [[1636년]] [[5월 15일]]<ref>{{서적 인용|author=李國祁|authorlink=|title=中國歷史|series=|publisher=三民出版社|isbn=9789571406565}}</ref> 또는 [[1644년]] [[6월 5일]]<ref>{{서적 인용|author=李國祁|authorlink=|title=中國歷史|series=|publisher=三民出版社|isbn=9789571406565}}</ref><ref group="주">Pamela Kyle Crossley 「신청사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 윤영인 편,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 동향』, 동북아역사재단, 2010, 1쪽, "20세기 초 중국의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청대사를 “왕조,” 즉 단순히 중국사의 한 시기로 규정했고 이러한 관점은 곧바로 영어권 학계에 전해졌다. 이 세대가 남긴 놀라운 학문적 유산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바로 청조의 시종(始終) 연도이다. 지금 학자들은 청대가 중원의 정복으로 시작하여 1911년 10월 중국 민족주의자들의 봉기에 끝났다는 견해를 다시 검토하고 있다. 청대를 “1644년부터 1911년까지”로 보는 것은 중국의 강고한 민족주의적 역사관이 낳은 직접적인 결과이다."</ref> ~ [[1912년]] [[2월 12일]]<ref>{{서적 인용|author=李國祁|authorlink=|title=中國歷史|series=|publisher=三民出版社|isbn=9789571406565}}</ref> 또는 [[1924년]] [[1월 5일]])은 '''대청제국'''(大淸帝國)<ref>, 《[[고종실록]]》 39권, 광무 3년 9월 11일 양력 4번째기사, "光緖二十五年八月初七日。 大淸帝國欽差議約全權大臣二品銜太僕寺卿徐壽朋。"</ref><ref>《[[흠정헌법대강]]》"一、大清皇帝統治大清帝國,萬世一系,永永尊戴。"</ref> '''청조'''(淸朝)<ref>《[[효종실록]]》 8권, 순치 9년 3월 30일 신축 2번째기사, "遽遭李子成之亂, 且綠淸朝侵伐南京, 弘光天子被害, 天下洶擾, 小商等不敢回歸, 轉投交趾, 行商爲業, 今至七年。 竊聞, 淸朝, 愛民如子, 故將還本土, 正月二十二日自日本發船, 二月初九日到貴國地方, 遇風船敗, 同伴二百十三人皆溺死, 存者僅二十八人。 懇祈老爺, 大發慈悲, 直送小商等于日本, 則庶可得生也。 若送北京, 道路逾遠, 二三年當到本土, 而其全生得達, 不可必也。 自此距日本, 纔數日程, 自日本距南京, 亦數月程, 父母、妻子重得相逢, 恩莫大焉。 伏乞稟于國王殿下, 施行云云。卓男悉記所見, 且將供辭, 報于濟州牧使李元鎭, 元鎭馳狀以聞。</ref>, '''중화대청국'''(中華大清國)<ref>《[[톈진조약|미중천진조약]]》, "茲中華大清國與大亞美理駕合眾國因欲固存堅久真誠友誼,明定公正確實規法,修訂友睦條約及太平和好貿易章程,以爲兩國日後遵守成規,爲此美舉。"</ref>, '''암바 다이칭 구룬'''({{llang|mnc|{{MongolUnicode|ᠠᠮᠪᠠ<br>ᡩᠠᡳᠴᡳᠩ<br>ᡤᡠᡵᡠᠨ}}|Amba Daicing Gurun}})<ref>石橋秀雄,「大淸國の國書]」(『歷史と地理』, 世界史の硏究 162, 山川出版社, 1995)</ref><ref group="주">{{서적 인용|author1=윤영인|author2=이용규|author3=김선민|author4=토마스 알슨|author5=미할 비란|author6=테무르|author7=파멜라 크로슬리|author8=이시바시 다카오|authorlink=|title=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동향|series=|publisher=[[동북아역사재단]]|page=218~219|isbn=9788961871976}}, 청말에는 국호인 대청(大淸)에 대한 [[만주어]] 표기가 청 초기의 ‘대청(Daicing)’에서 ‘대대청(Amba Daicing)’으로 변화하고 있다.</ref>, '''만청'''(滿淸)<ref>Pamela Kyle Crossley 「신청사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 윤영인 편,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 동향』, 동북아역사재단, 2010, 1쪽, "'''滿淸'''"이라는 용어는 과거 제국의 무능력, 부패, 압제에 대한 비난과 함께 [[중국어]] 저술에서 널리 사용되었다."</ref>, '''중국'''(中國, {{llang|mnc|{{MongolUnicode|ᡩᡠᠯᡳᠮᠪᠠᡳ<br />ᡤᡠᡵᡠᠨ}}|Dulimbai Gurun}})이라고도 한다.
 
청 제국은 현재 [[중국]] 본토 지역에 존재했던 정복 왕조 가운데 가장 큰 정치적 실체였다. 청은 1644년에 멸망한 [[명나라]]보다 영토는 2배 이상 커졌고, 인구는 3배 이상 늘어났다. 청 제국 내에는 정복된 수많은 '[[한족]]'뿐만 아니라 남서쪽 변경 지대를 따라 거주했던 [[버마족]]과 [[타이족]], [[대만]]과 그 밖의 변방과 내지의 고지대에서 새롭게 식민지화 된 정복지역의 원주민들, 그리고 청의 왕좌를 차지한 [[만주족|만주인]]이 있었다.<ref>{{서적 인용|author=WilliaWilliam T Rwe|authorlink=|title=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series=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27-9|page=11}}</ref>
 
청은 [[:en:Portal:History of Imperial China|중화제국 2000년 역사]]를 마감하는 장이 됐지만,<ref>{{서적 인용|author=William T. Rowe|authorlink=|title=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series=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27-9|page=12}}</ref> 청의 통치자인 만주족은 그들의 영역을 전적으로 '중국화'하지는 않았다. 단지 수많은 종족 구성원들을 통치하기 위해 한족 세계에서는 [[진시황]]과 [[한 무제]]로부터 이어져온 중화의 '[[황제]]'이자 '[[천자]]', [[몽골]] 유목민의 초원 세계에서는 '[[카안]]'({{llang|mn|{{만몽 유니코드|ᠬᠠᠭᠠᠨ}}|Qa'an}}), 티베트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 불교]]도의 세계에서는 [[쿠빌라이 카안]]의 전통을 이은, 불법의 수호자인 '[[전륜성왕]]'이자 '[[문수보살]]대황제'<ref>{{서적 인용|저자=[[:zh:董誥|董誥]] 등|날짜=1778년|제목=[[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인용문=每歲西藏獻丹書皆稱曼珠師利大皇帝 翻譯名義曰曼珠華言妙吉祥也 又作曼殊室利大敎王經云 釋迦牟尼師…}}</ref>, 타림 분지의 [[위구르]] [[무슬림]] 세계에서는 1758~59년 이전의 지도자, [[준가르]] [[콩타이지|홍 타이지]]를 대체한 [[이리]]장군({{llang|mnc|{{만몽 유니코드|ᡳᠯᡳ<br>ᠵᡳᠶᠠᠩᡤᡳᠶᡡᠨ}}|Ili Jiyanggiyūn}})을 통한 간접적인 지배자이자 '[[이슬람]]의 보호자'라는<ref>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제4장 청 제국과 러시아, 민음사, 225쪽</ref> 유가적 배역을 맡았을 뿐이다.<ref>{{서적 인용|author=William T. Rowe|authorlink=|title=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series=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27-9|page=356~365}}</ref> 따라서 청을 중화제국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틀린 관점이며, 중국은 청의 일부일 뿐이며, 한족 신민들은, 숫자가 절대 다수였음에도, 만주족 고유의 여러 가지 특성이 제도와 문화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청 제국<ref>{{서적 인용|author1=Crossley, Pemela Kyle|author2=양휘웅|authorlink=|title=만주족의 역사|series=|publisher=돌베게|isbn=9788971995310|page=374}}</ref> 아래에서 정치·문화적으로 소수였다.<ref>Reuven Amitai-Preiss, David O. Morgan, 《The Mongol Empire & its Legacy》, BRILL, 1999, pp. 260 ~ 73</ref> 《대청율례(大淸律例)》는 단지 한족 신민들만을 위한 것으로, 제국의 나머지 신민들은 체계의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홍무제]]가 펴낸 《대명율(大明律)》에서 그 내용을 거의 따왔기 때문에 비한족 신민들에 적용된 사례가 없다. 청 제국의 각 종족은 각기 다른 법률을 적용받았다. 만주족은 《팔기칙례(八旗則例)》 티베트와 몽골족은 《이번원칙례(理藩院則例)》, [[동투르키스탄]]의 무슬림은 《회동칙례(會同則例)》의 적용을 받았다.<ref>M. Shimada, Shinchō Mōko Rei no Kenkyū</ref>
 
== 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