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에 조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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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에는 도쿄외국어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나 덕으로 가르치는 것[徳育教育]을 중요시하는 초민의 교육방침과 [[일본 문부성]]의 관점에 차이가 있어 곧 사직했다. 원로원 부의장으로 일하던 [[고토 쇼지로]]가 서기관으로 임명했다.<ref>[http://dl.ndl.go.jp/info:ndljp/pid/993587/10『 수중 관원록 메이지 8년 7월 』 니시무라 구미 출판 조로 1875년]</ref> 조사과 번역국 등을 거쳐 1876년 국헌취조국에서 일하면서 井上毅 등과 헌법 초안[国憲案]작성을 위한 번역일을 계속 했다. [[카츠 카이슈]]와도 교류하게 되었고 다음해에 혼담이 있었으나 깨졌다. 카츠 카이슈, 사츠마 번벌의 海江田信義, [[시마즈 히사미쓰]]등과 함께 책론『策論』을 건의했다. 1877년 사직했고 [[세이난 전쟁]]중에도 불란서학교를 계속 운영했다. 이 시기 宮崎八郎의 사쓰마 군 참전을 말리기 위해 구마모토로 갔었다는 말도 있다. 1879년 고치현 사족의 딸인 鹿와 결혼했지만 다음해 이혼했다.
 
 
; 재야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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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년 오사카에서 창간된 동운신문의 주필이 되었다. 초민의 연설에 감명받은 角藤定憲의 시국연극 기획을 지지하고 대일본장사개량연극회를 만들어 시국연극[壮士芝居]의 선구가 되었다. 그때 진행한 연극중에는 『勤王美談上野曙』가 있었는데 초민이 [[고토쿠 슈스이]]에게 만들어보라고 했던 것이다. 이 시국연극은 신파극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 중의원 당선
 
1889년 [[일본 제국 헌법]] 공포와 함께 추방도 사면되었다. 1890년 [[제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있어 본적을 [[부라쿠민]]이 있는 쪽으로 옮기고 오사카4구에서 출마했다. 나는 사회 최하층 중에서도 하층의 사람이 되겠다. 인도의 파리야나 그리스의 이로트의 동료인 신평민이 되겠다. 지난날 에다(穢多)라고 불리며 추방된 사람이 되겠다. 「余は社会の最下層のさらにその下層におる種族にして、インドの「パリヤー」、ギリシャの「イロット」と同僚なる新平民にして、昔日公らの穢多と呼び倣わしたる人物なり」<ref>1889년 대원 거사의 필명으로 "새벽 신문"에 발표한 논설"신민 세계"보다.</ref>라고 선언한 초민은 부라쿠민들의 지지를 얻어 1352표로 당선되었다.<ref>[http://dl.ndl.go.jp/info:ndljp/pid/1350244/12『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일람 』 중의원 사무국, 1912년 2월 p.6]</ref> 초민의 두번째 부인인 마츠자와도 부락민 출신이었다는 말도 있으나<ref>이노우에 키요시는 『 부락의 역사와 해방 이론 』에서 "조민의 아내는 나가노 현의 부락 출신인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말하고 있는</ref> 실제론 대대로 [[신관]]을 맡고 있던 집안 출신이라고 한다. <ref>[[#쿠와바라 1966| 쿠와바라]], P26</ref><ref>[[#마츠모토 1973| 마츠모토]], P28</ref> 역시 낮은 신분으로 여겨진다.
 
{{도쿄 외국어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