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 타이거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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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 1985년 : 김응룡 감독의 첫 세 시즌 ===
1983년 [[미국]] 조지아 서던 칼리지에서 야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응용 감독이 4800만원의 계약금과 연봉을 합친 금액에 부대조건으로 승용차 한대를 받고 해태 2대 감독으로 취임하여 대대적인 팀 개편에 들어갔다. 먼저 조창수와 유남호으로 이뤄진 기존의 코치진에 군산상고 감독 출신 백기성과 동국대 감독으로 있던 김인식을 추가 영입해 코치스태프를 강화했다. 그 외에도 부족했던 선수를 보강하기 위해 삼성에서 벤치로 밀려나있던 서정환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했고 재일교포 선수인 김무종과 주동식을 영입해 팀의 약점인 배터리를 든든하게 했다. 한편 김응용감독은 스파르타식 훈련을 앞세운 전임 감독과는 정반대로 팀훈련 외 시간 은 철저하게 선수들의 자율에 맡겼다. 단체훈련도 하루 3시간을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 1983년 6월 25일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김응롱 감독은 프로 선수에겐 결점 보완의 처방만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훈련은 각자가 하는거지요.라고 밝혔다.
[[미국]] 조지아 서던 칼리지에서 야구 유학을 마친 [[김응룡]] 감독을 [[김동엽]]의 후임으로 영입한 해태 타이거즈는 [[1983년]] [[6월 24일]]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롯데]]와의 경기에서 전기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주포 [[김봉연]]의 교통사고로 인해 후기 리그 우승을 [[MBC 청룡]]에 넘겨 주고, 55승 44패 1무, 최종 순위 2위로 정규 시즌을 마감한다.
 
그 결과 해태는 시즌 전 중위권 전력이라던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1983년]] [[6월 24일]]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롯데]]와의 경기에서 전기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6월 초까지 장명부를 앞세운 삼미와 1위자리를 놓고 엎치락 뒤치락을 거듭했고 2.5게임차로 뒤진 가운데 6월7일 부터 열린 광주 3연전 맞대결을 싹쓸이 하며 단독 1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마침내 6월 24일 삼미가 OB에게 패하면서 해태는 남은 경기와 관계없이 한국시리즈 직행을 확정 짓게 되었다. 그러나 주포 [[김봉연]]의 교통사고로 인해 후기 리그 우승을 [[MBC 청룡]]에 넘겨 주고, 55승 44패 1무, 최종 순위 2위로 정규 시즌을 마감한다.
 
[[MBC 청룡]]과 맞붙었던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마운드의 에이스 [[이상윤 (야구인)|이상윤]]과 [[김용남]], 그리고 최초의 언더핸드 [[주동식]]과 타선에서는 [[김봉연]], [[김성한 (1958년)|김성한]], [[김종모]] 등 'KKK포'의 활약 속에 해태는 4승 1무로 첫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안게 된다. 그러나 [[1984년]]과 [[1985년]]에는 모두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게 된다. [[1984년]] 해태 타이거즈는 전기 리그 4위, 후기 리그 3위로 43승 54패 3무, 최종 순위 5위로 정규 시즌을 마감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5월 5일]]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광주무등구장]]에서 벌어진 [[삼미 슈퍼스타즈|삼미]]와의 경기에서 [[투수]] [[방수원]]이 [[한국 프로 야구]]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1985년]]에도 해태 타이거즈는 전기 리그 3위, 후기 리그 3위로 59승 52패 1무, 최종 순위 3위로 정규 시즌을 마감하였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인 [[외야수]] [[이순철]]과 [[투수]] [[선동열]], 그리고 홈런왕과 최다 안타, MVP를 차지한 [[김성한 (1958년)|김성한]]의 활약으로 [[1986년]] ~ [[1989년]] [[한국시리즈]] 4연패의 기틀을 쌓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