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5 바이트 추가됨 ,  1년 전
태그: m 모바일 웹
태그: m 모바일 웹
조선 천주교회에서는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가 천주교 공동체에서 영향력이 있는 양반 신자들을 감싸고 도는 바람에, 민중신자들이 소외되고 있었음을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에게 비판했다가 갈등이 생겼다. 최양업 신부는 [[신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지만, 학문이 없는 [[평신도]]들을 [[한글]]로 교리를 가르치는 세심함으로써 배려했다.<ref>[http://www.koreanmartyrs.or.kr/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8&bbs_number=1100 시복시선 주교특별위원회]</ref> 최양업 신부는 사회개혁가이기도 했다. 그는 [[민중]]들의 소외, 양반계급의 무위도식등을 비판함으로써 [[신분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선종 ===
최양업은 [[1861년]] [[6월 15일]] [[영남]] 지방의 사목 활동을 마치고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에 [[과로]]와 [[식중독장티푸스]]으로 40세의 나이에 [[문경]]에서 병으로 선종하였다. 그 후 [[제천시]] 배론에 안장되었으며, [[일제 강점기]]때 비석과 묘비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이루지 못하다가 [[1945년]] 광복 이후 비석과 묘비를 세웠다.
 
=== 시복청원 ===
[[김대건]] 신부는 '피의 순교자'라 하여 [[1984년]] [[성인 (종교)|성인]]으로 시성되었지만, 최양업 신부는 [[순직]]이었기 때문에 시성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에 '땀의 순교자'라는 호칭이 그에게 붙여졌으며, [[2001년]]부터 한국 천주교회에서 불기 시작한 한국 시복시성운동의 일환으로 [[2004년]] 최양업 신부와 124명의 [[순교자]]들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교황청]]에 시복청원을 해놓은 상태이다.
익명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