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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국가에서는 천문과 역법을 중시한다. 그래서 조충지는 나라의 발전 및 국민의 생계와 직접 연관되어 있는 천문과 역법에 대한 연구를 자신의 천직으로 삼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천문학자 하승천(何承天)이 만든 역법인 『원가력(元嘉歷)』을 쓰고 있었다. 조충지는 『원가력』을 깊이 연구하고 치밀하게 계산해 본 후 정확하지 않은 데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장기간의 관찰과 정밀한 계산, 그리고 역대 역서의 성과들을 참고하여 새로운 역법인 『대명력(大明歷)』을 만들었다. 장기간의 관찰을 거쳐 그는 동지가 45년마다 1도씩 뒤로 물러간다는 것을 계산해 내고 태양년(太陽年,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 365.24281481일임을 측정해 냈다. 이 시간은 현대 과학으로 측정한 시간과 50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며 오차는 60만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달이 지국르 한 바퀴 도는 날짜 수 또한 오차가 1초도 되지 않아 훌륭한 역법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서른셋 이었다.
 
더하여 하루에 백리를 갈 수 있는 [[[천리선]]] , 제갈량의 [[[목우유마]]] (군량을 운반 하기 위해 소와 말을 본떠 만든 수레) , [[[지남차]]] (방향을 제시하는 수레) 등의 기계 제작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 하였다. 음악에론에도 조예가 깊었고 소설까지 집도 할 만큼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462년,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조충지는 이 『대명력』을 조정에 바쳤다. 효무제는 역법을 아는 관원들을 모아서 『대명력』의 채택 여부를 논하게 했다. 그리하여 혁신파와 보수파 간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그러자 조충지는 실제적 이론과 투철한 견해로 많은 대신들을 설득시켰다. 그 결과 효무제는 연호를 고칠 때 『대명력』의 실시를 전국에 공포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효무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대명력』은 조충지가 세상을 뜬 지 1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전국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했다. 효무제가 죽고 나서 얼마 후에 송나라 금위군을 관할하는 소도성(蕭道成)이 정변을 일으켜서 송나라를 멸망시켰다. 소도성은 479년에 즉위하여 남제(南齊)를 건립했는데 그가 바로 고제(高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