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군: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79번째 줄:
 
=== 남연군 후손들의 사도세자 강조와 연령군 회피 ===
19세기까지만 해도 운현궁가에서는 자신들을 사도세자 또는 장조의 별자별자였던 은신군의 후손임을 강조하였다. 장조의 서차남 은신군이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정해졌지만 이는 은신군 사후에 정조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다. 은신군도 아들이 없었으므로 [[인평대군]]의 6대손6대손이던 진사 이병원의 차남 채중을 은신군의 양자로 사후입양하였다.
 
정조가 영조의 유지를 이유로, 은신군을 연령군의 후사로 정하면서 은신군 집안을 계승하는 사람이 연령군가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은신군의 양자인 남연군의 후손들은 연령군을 선조로 하지 않고, 사도세자를 강조했다. 1792년 편찬된 [[선원계보기략]]에도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되어 있었고, 고종이 즉위한 뒤에 편찬된 선원보들도 사도세자의 자녀 항목에 은신군을 넣었으며, 출계(出系)라는 단어를 넣지도 않고 사도세자의 아랫 부분에 은신군의 이력을 기록하였다. [[1892년]] 발행된 선원계보기략에도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