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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년]](중종 36) 여름 4월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함께 뽑힌 12사람과 더불어 계(契)를 닦고 이름을 「호당수계록(湖堂修契錄)」이라 했다. 이들과는 서로 학문적 교류가 각별하였다.<ref>호당수계록 13인 : 간재 [[최연 (강릉)|최연]], 십성당 [[엄흔 (1508년)|엄흔]], 추파 [[송기수의 묘역|송기수]], 송재 나세찬, 국간 윤현, 죽계 임열, 지산 [[이황]], 금호 임형수, 우암 김수, 상덕재 [[정유길]], 급고재 이홍남, 호학재 [[민기]]</ref> 겨울 10월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겸 경연정경(兼經筵典經) 춘추관 기사관(春秋舘記事舘)에 제수되었다.
 
[[1542년]](중종 37) 가을 7월에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들이 맡는 요직인 [[대간|청요직]] 홍문관(弘文館) 저작(著作)에 승진되었다.
 
[[1543년]](중종 38) 1월 동궁(東宮)에 불이 발생되어 안채가 잿더미가 되고, 방화범이 누구인지를 둘러싸고 조정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여름 4월에 홍문관 박사(博士) 겸 세자시강원(兼世子侍講院) 설서(說書)로 승진되었다. 이때에 [[조선 인종|인종]]이 춘궁(春宮)에서 덕을 기르는데, 세자 보도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겼다. 세자는 그의 학문·도덕의 훌륭함을 깊이 알고 정성스런 마음과 공경하는 예로써 소대(召對)를 자주 하였으며, 그 역시 세자의 덕이 천고에 뛰어나 후일 요․순 시대의 다스림을 기약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지성껏 이끄니 서로 뜻이 맞음이 날로 두터웠다. 그가 입직해 있을 때에는 세자가 간혹 몸소 나와 나라의 어려운 국정에 대해 논의하다 이슥해서야 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