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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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때 해로할 임 잃어버리고 나니,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가 희었소.
슬픔 속에 사니 봄가을 몇 번이더냐, 아직도 죽지 목해 살아 있다오.
백주는 옛 물가에 있고, 남산엔 해마다 고사리가 돋아나누나. 오히려 부렵구려 주왕(周王) 비의 생이별은, 만난다는 희망이나 있으니.}}
오히려 부렵구려 주왕(周王) 비의 생이별은, 만난다는 희망이나 있으니.}}
 
[[1547년]](명종 2) 그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節義)'를 고수하는 생활로 일관했다. 봄에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가을에 공조정랑(工曺正郞)으로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길을 가다 병으로 사(辭)하고 돌아왔다. 또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제수되었으나 바로 체직(遞職)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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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향해서는 자연에 귀의하여 모든것을 버리고 체념하였는바 오히려 마음은 태평스러웠다. 이러한 마음을 표현한 시(詩)가 『자연가』(自然歌)로 이때 지었다.
 
{{인용문|[자연가(自然歌)]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도 절로 물도 절로하니, 산수간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 삼긴 인생이라, 절로 절로 늙사오리.}}
 
[[1555년]](명종 10) 12월 참찬관 박민헌이 말하기를 「경연관으로서 신 같은 무리는 「서경」(書經)에 나오는 글들을 잘 모르니, 모름지기 유학자 [[이황]]과 김인후를 구하여 아침 저녁으로 더불어 강론한다면 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며 그들을 불려 강론에 참석시키면 인도하는 공(功)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