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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을사년]] 이후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무렵이면 글을 그만두고 손님도 만나 보지 않으며, 우울한 기분으로 날을 보내며 문밖을 걸어 나간 적이 없었다. 또 [[조선 인종|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을 가지고 집 앞 '난산(卵山)'에 들어가 곡을 하고 슬피 부르짖으며 밤을 지세고 내려오기를 평생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한결 같았다. 또 [[조선 인종|인종]]을 그리고 애도하는 처절한 심정으로 「유소사(有所思)」와 「조신생사(吊申生辭)」의 시를 지었다.
 
{{인용문|[유소사(有所思)]
임의 나이 삼십을 바라 볼 때, 내 나이 서른하고 여섯이었소.
신혼의 단꿈을 반도 다 못 누렸는데, 시위 떠난 화살처럼 떠나간 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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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때 해로할 임 잃어버리고 나니,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가 희었소.
슬픔 속에 사니 봄가을 몇 번이더냐, 아직도 죽지 목해 살아 있다오.
백주는 옛 물가에 있고, 남산엔 해마다 고사리가 돋아나누나.
오히려 부렵구려 주왕(周王) 비의 생이별은, 만난다는 희망이나 있으니.}}
 
[[1547년]](명종 2) 그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節義)'를 고수하는 생활로 일관했다. 봄에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가을에 공조정랑(工曺正郞)으로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길을 가다 병으로 사(辭)하고 돌아왔다. 또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제수되었으나 바로 체직(遞職)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