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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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둥 성]] 출신으로 [[홍콩]]에서 의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혁명]]에 뜻을 품고 [[1894년]]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조직하여 이듬해 [[광저우 시|광저우]]에서 최초로 거병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 망명하면서 [[삼민주의]]를 착상, 이를 제창했다.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 화교들을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 반청 혁명운동을 전개했다.<ref name="한국근현대사사전">《한국근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년, p142~p143</ref>
 
[[1911년]] 쑨원은 [[난징 시|난징]]에서 [[신해혁명]]을 크게 성공시킴으로써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북양군벌]]의 거두 [[위안스카이|원세개]]와 타협, 같은 해 [[3월 1일]] [[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권력|실권]]을 위임하였고 급기야는 같은 해 [[3월 10일]] [[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대총통직을 넘겨주었다. 같은 해 '제2혁명'에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이듬해 [[중화혁명당]]을 결성하여 반원(反遠, 반 [[위안스카이|원세개]])운동을 계속했다. [[1917년]] [[광저우]]에서 군정부를 수립, 대원수에 취임하고, [[1919년]] 중화혁명당을 개조, [[중국 국민당]]을 결성했다.<ref name="한국근현대사사전"/> [[1924년]] 국민당대회에서 '연소, 용공, 농공부조'의 3대 정책을 채택,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켰다.<ref name="한국근현대사사전"/> 이어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국민혁명'을 제창, 국민회의를 주장했으나, 이듬해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쑨원의 묘는 [[난징 시|난징]]에 있다. 오늘날 [[중화민국]]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마오쩌둥]]보다도 유명한다음가는 혁명사상가로 선구자로서 존경받고평가되고 있다.<ref name="한국근현대사사전"/>
 
쑨원은 한국의 독립 운동 지원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창립에 커다란 일조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1962년]]과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ref name="한국근현대사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