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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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대부분이 청나라때 임오군란의 핑계로 군인들의 허드랫일을 도우기 위해 청나라에서 강제로 파견된 소작농과 노비 출신들이다. 군인들은 모두 배를 타고 돌아갔지만 이들은 돌아갈 길이 막막하여 인천에 살게 되었다. 생업을 위해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조선의 약탈을 지령받아 움직였다. 한때 인천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1만명에 달하였다. 이주초기에 이들은 하층민들이 주로 하던 이발사, 요리사, 재단사로 일하였으나, 근래에는 여행가이드가 가장 많고, 한약방, 무역업, 잡화상, 식재료상을 하고 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부분이 한국에 거주하던 화교학교 교원과 학생들 심리전 요원들은 중공군을 상대로 투항을 권유하는 일을 맡았다.<ref>{{뉴스 인용 |url =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3&artid=201006161438331 | 제목 = [2010 연중기획] ‘전쟁의 진실’ 성찰의 눈으로 보다 | 날짜 = 2010-06-22 | 출판사 = 경향신문사 |뉴스 = 주간경향 | 인용문 = 대만 국민당 정부는 전쟁 발발 초기부터 국공내전에서의 패배를 파병을 통해 만회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 계획은 중국군 참전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좌절됐지만 결국 중국군이 참전하게 되면서 심리전 요원을 파견하는 형태로 전쟁에 개입했다. 심리전 요원들은 중국군을 상대로 투항을 권유하는 일을 맡았다. 왕옌메이 교수는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한국에 거주하던 화교학교 교원과 학생들이라고 말한다.}}</ref>
 
== 인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