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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년]](중종 37) 가을 7월에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들이 맡는 [[대간|청요직]] 홍문관(弘文館) 저작(著作)에 승진되었다.
 
[[1543년]](중종 38) 1월 동궁(東宮)에 불이 발생되어 안채가 잿더미가 되고, 방화범이 누구인지를 둘러싸고 조정에서는 논란이 벌어지는 등 전국이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그해 여름 4월에 홍문관 박사(博士) 겸 세자시강원(兼世子侍講院) 설서(說書)로 승진되었다. 이때에 [[조선 인종|인종]]이 춘궁(春宮)에서 덕을 기르는데, 세자 보도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겼다. 세자는 그의 학문·도덕의 훌륭함을 깊이 알고 정성스런 마음과 공경하는 예로써 소대(召對)를 자주 하였으며, 그 역시 세자의 덕이 천고에 뛰어나 후일 요․순 시대의 다스림을 기약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지성껏 이끄니 서로 뜻이 맞음이 날로 두터웠다. 그가 입직해 있을 때에는 세자가 간혹 몸소 나와 나라의 어려운 국정에 대해 논의하다 이슥해서야 파하였다.
 
또 세자는 본래 예술에 능하였으나 일찍이 남에게 나타내 보인 적이 없었는데 유독 그에게 손수 그린 『묵죽』(墨竹)을 하사하여 뜻을 비치고, 눌러 그에게 명하여 화축(畵軸)에다 시를 지어 쓰도록 하니 그 시가 아래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