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촨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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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제1차 아편 전쟁|아편 전쟁]]이 중국 근대사의 서막을 열었다. 그러나 1895년에 이르러 [[이홍장]](李鴻章)과 일본 정부 대표 [[이토 히로부미]]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사천의 문호 충칭을 무역항으로 개방하도록 규정하였으니 이때서야 진정한 [[근대]]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자연히 사천 사회의 경제가 점차 붕괴되고 [[반식민지]]화되자 [[민족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다.
 
1860년대, [[석달개]](石達開)가 쓰촨에 진입한 후 또다시 [[성도 교안]] 사건과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다. 사천에서 발발한 [[보로운동]](保路運動)은 [[신해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1911년 성도는 독립된 군 정부를 세웠다. 1912년 쓰촨은 정식으로 중화민국의 한 개 성(省)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사천은 장장 21년간의 [[군벌 시대|군벌]]혼전시기에 빠졌는데, 1933년에 이르러 [[유상류샹 (군인)|류샹]](劉湘)이 [[장제스]]가 사천 성에 진입하려는 반란을 차단하고 이를 평정하였다.
 
[[중일 전쟁|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연해(沿海)․연강(沿江)지역의 각종 공업, 광업 기업, 고등 교육 기관, 문화 단체가 잇달아 사천 지역으로 옮겨왔고, 사천 지역은 다시금 중국의 후방이 되었다. 동시에 300만 사천 군이 사천 지역으로부터 출병하여 항전함으로써 항일전쟁에 큰 공헌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