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5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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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5세는 정치적으로 일관되게 로마에서 황제의 대리인으로 행동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많은 수도원에 특별한 권리를 부여하였다. 그가 교황이 된 후 한 첫 번째 활동은 996년 5월 21일 오토 3세를 황제로 대관시킨 것이다.<ref>''Medieval Germany: An Encyclopedia'', Ed. John M. Jeep, (Garland Publishing, Inc., 2001), 961.</ref> 그리고 대관식이 있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시노드를 소집했다. 시노드에서 그는 [[아르눌프 (랭스의 대주교)|아르눌프]]에게 그의 주교좌인 [[랭스]]로 복귀할 것을 지시한 한편 제르베르(훗날의 [[교황 실베스테르 2세]])를 주교좌를 찬탈한 죄로 비난하였다. 주교들을 지명할 권리를 주장한 [[로베르 2세 (프랑스)|로베르 2세]]는 프랑스 왕국 전역에 대한 교황의 파문 선언 때문에 결국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으며, 혼인 문제 때문에 자신의 아내 베르타와도 결별해야만 했다.<ref>Eleanor Shipley Duckett, ''Death and Life in the Tenth Century'',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88), 130.</ref>
 
997년 파비아 공의회에서 최종적으로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크레센티우스 2세와 로마의 귀족들은 사촌지간인 어린 황제 오토 3세의 뜻에 따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레고리오 5세를 반대하고, 대신 [[피아첸차]]의 대주교 요한 필라가토스를 [[대립 교황대립교황 요한 16세]](997–998)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크레센티우스 2세의 반란은 로마로 진격한 오토 3세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대립 교황대립교황 요한 16세는 도주했으며, 크레센티우스 2세는 [[산탄젤로 성]]에 감금되었다. 황제의 군대는 대립 교황을대립교황을 추적해 생포한 다음 그의 코와 귀, 혀를 잘라냈다. 또한 그의 눈을 멀게 만든 다음 오토 3세와 그레고리오 5세 앞에 끌고 가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다.<ref>''The Papacy: An Encyclopedia'', Ed. Philippe Levillain, (Routledge, 2002), 646.</ref> 대립 교황대립교황 요한 16세는 이후 독일에 있는 [[풀다 수도원]]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1013년 사망할 때까지 거주하였다. 한편 황제의 군대에 의해 포위된 산탄젤로 성은 998년에 함락되었으며, 크레센티우스 2세는 성벽에 목이 매달리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레고리오 5세는 어떠한 타살의 의혹 없이 998년 2월 18일 갑작스럽게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전]] 내부에 있는 [[교황 펠라지오 1세]]의 무덤 곁에 안장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제르베르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교황 실베스테르 2세]]로 즉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