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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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김인후 진상(眞像).jpg
|출생일 = [[1510년]] [[음력 7월 19일]]<br />양력 [[1510년]] [[8월 23일]]
|출생지 = [[조선]] [[전라도]] [[장성군|장성현]] 대맥동 자택(現 대한민국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사망일 = [[1560년]] [[음력 1월 16일]]<br />양력 [[1560년]] [[2월 11일]] (51세)
|사망지 = [[조선]] [[전라도]] [[장성군|장성현]] 대맥동 자택
|국적 = [[조선]]
|본관 = [[울산 김씨|울산]](蔚山)
|필명 = 자(字) 후지(厚之) <br /> 호(號) [[하서]](河西)ㆍ담재(湛齋) <br /> 시호(諡號) 문정공문정(文正)
|학력 = [[1540년]](중종 35년) 별시 문과 병과 급제
|직업 = 문신, 성리학자, 도학자, 사상가, 시인, 교육자, 정치가,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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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장성군|장성]] 출신으로, 본관은 [[울산 김씨|울산]](蔚山)이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ㆍ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에 종사된 [[동방 18현|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聰明)하고총명하고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0살 때 모재 [[김안국]](金安國)에게 『소학』을≪소학≫을 배웠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1531년]] 사마시에[[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때 퇴계 [[이황]](李滉)을 만나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 별시문과에별시 병과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권지승문원부정자에 임용되었으며,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홍문관 저작이 되었다.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또한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 해 12월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옥과현감으로 나갔다.
 
[[1545년]]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군|장성]]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의 [[성리학]] 이론은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이항 (1499년)|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태극음양설에 대하여, 그는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항 (1499년)|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하였다. 또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모두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수양론에 있어서는 성경(誠敬)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내용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고,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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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정철]](鄭澈)·오건(吳健)ㆍ양자징(梁子徵) 등이 있다
 
시문에도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며, 도학에 관한 저술은 일실(逸失)되어 많이 전하지 않는다. 저서로는 『하서집≪하서집≫(河西集)·『주역관상편≪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백련초해≪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장성군|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영귀서원에 제향(祭享) 되었으며, [[1796년]](정조 20) [[문묘]](文廟)종사(從祀)되고종사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문정이다.
 
== 약전 ==
=== 생애 초기 ===
==== 출생과 가계 ====
김인후는 신라 [[경순왕]] [[김부]](金傳)의 둘째 왕자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김덕지]](金德摯)의 후예이다. 그의 5대조인 조선 [[조선의 공신|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흥려군(興麗君) 김온(金穩)이 서울에서 살았으나, [[조선 태종|태종]]의 왕권강화 일환으로 외척 세력을 제거할 때 처가인 [[여흥 민씨]] [[민무구]] 형제 옥사에 연루되어 [[1413년]] 피화를 입자, 배위 정부인 [[여흥 민씨]]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전라도]] [[장성군|장성현]] [[황룡면|대맥동]]으로 낙담하여 자리를 잡게 되면서부터 자손들이 장성고을 사람이 되었다.
 
[[1510년]](중종 5) 7월 19일 [[전라도]] [[장성군|장성현]] [[황룡면|대맥동]]에서 아버지 의릉참봉 김령(金齡)과 어머니 [[옥천 조씨]] 사이에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맑고 순수하며 생김새가 단정하고 기개와 도량이 넓고 두터워 부친 참봉공의 사랑이 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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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 ===
[[1540년]](중종 35) 겨울 10월에 별시 문과에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다.
 
[[1541년]](중종 36) 여름 4월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함께 뽑힌 12사람과 더불어 계(契)를 닦고 이름을 「호당수계록(湖堂修契錄)」이라 했다. 이들과는 서로 학문적 교류가 각별하였다.<ref>호당수계록 13인 : 간재 [[최연 (강릉)|최연]], 십성당 [[엄흔 (1508년)|엄흔]], 추파 [[송기수의 묘역|송기수]], 송재 나세찬, 국간 윤현, 죽계 임열, 지산 [[이황]], 금호 임형수, 우암 김수, 상덕재 [[정유길]], 급고재 이홍남, 호학재 [[민기]]</ref> 겨울 10월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겸 경연전경(兼 經筵典經) 춘추관 기사관(春秋舘 記事舘)에 제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