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니스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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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초기의 생애와 즉위 ===
요안니스는 알렉시오스 1세와 황후 [[이레네이리니 두케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누나 [[안나 콤니니]]는 동생에 대한 기록을 별로 남기지 않아서 그의 자세한 성장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다. 당대의 역사가인 [[티레의 기욤]]은 그가 키가 작고 아주 못난 인물로 피부가 검은색으로 [[무어인]] 같았다고 묘사한다.
 
[[1118년]] 아버지 알렉시오스의 병세가 악화되고 후계자를 선출하는 문제가 불거졌을때 어머니 이리니와 누나 안나는 니케포루스니키포로스 브리엔니우스를브리엔니오스를 차기 황제로 점찍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는 황후와 안나 공주의 요구를 물리치고 자신의 아들 요안니스를 후계자로 정하고 죽었다. 결국 요안니스는 1118년에 황제로 즉위했는데 즉위 초기 누나와 매형이 연루된 암살음모가 있었으나 피했다. 쿠테타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요안니스는 관용을 베풀어 매형 니키포로스는 장군으로 다시 기용하고 안나는 수녀원으로 추방하는데 그쳤다.
 
=== 제국의 방위 ===
그의 제위 초기 제국의 서방에서는 비교적 문제가 없었다. 로마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서방제국 황제]] 황제는 서로 패권다툼을 벌이고 있었고 [[도나우 강]] 거너편의 [[쿠만족]]과 [[페체네그인]]도 잠잠했다. 이탈리아 이탈리아에서도남부에서도 [[노르만족]]의 [[아풀리아]]에서는 [[로베르토 기스카르]]가 죽은 이후 혼란이 계속되어 제국의 위협이 되지 못했다.
 
요한네스는요안니스는 [[1119년]]부터 [[1121년]]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제국]]으로 원정을 떠나 아나톨리아 남부에 대한 비잔티움의 지배를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그해 [[페체네그인]]이 [[트라키아]]를 유린하자 군대를 서방으로 돌렸다. 요한네스는 그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면서도 각 부족을 이간질시키는 한편 군사적으로도 완전히 제압하여 다시는 제국에 반기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고 페체네그 족을 제국의 [[푀데라티]]로 삼고 제국군대에 복무시켰다.
 
한편 [[베네치아 공화국]]과 비잔티움 제국은 [[1082년]] 조약을 맺고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 족에 대항하기 위해 베네치아 함대를 빌리는 대가로 베네치아에게 통상특권을 부여했는데 요한네스는요안니스는 이 조약의 갱신을 거절했다. [[1122년]] 베네치아 함대는 코르푸를 포위 공격하는 한편 이후 3년동안 [[로도스]], [[키오스]], [[사모스]], [[레스보스]], [[안드로스]] 등의 섬을섬들을 점령했다. [[1126년]] 초 요한네스는 결국 베네치아 함대에 굴복하고 베네치아에 통상 특권을 다시 허용하였다.
 
또한 1128년 헝가리 왕국이 제국을 침입해와 [[베오그라드]]와 니시를 점령하였는데 요한네스는요안니스는 즉각 반격에나서 헝가리군을 몰아내고 제국의 도시들을 다시 탈환하였고 제국 서방의 방위를 든든히 하였다.
 
=== 안티오키아의 수복 ===
요한네스가요안니스가 제국 서방의 문제에 매달려 있던 10년 동안 [[아나톨리아]]에서는 [[다니슈멘드]]가 발흥하여 소아시아의 강자로 떠올랐으며 1130년 2월 [[보에몽 2세]]의 [[안티오키아 공국]]의 군대를 격파하여 [[안티오키아]]를 점령하였다. 1130년부터 1135년까지 요한네스는 다섯 차례나 다니슈멘드를 공격했고 완벽한 승리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선할 수 있었다. 또한 다니슈멘드의 아미르 가지가 예상 외로 죽는 바람에 아나톨리아 회복은 더욱 쉬워졌다.
 
요한네스는요안니스는 최근 [[시칠리아의 군주|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받고 [[안티오키아]]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는 [[루지에로 2세]]에 대한 대비책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로타르]]에게 시칠리아를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십자군 국가]]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당시 안티오키아 공국은 보에몽이 아미르 가지에게 죽은 이후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의 섭정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보두앵의 어린 딸 [[안티오키아의 콩스탕스|콩스탕스]]와 그의 남편 [[안티오키아의 레몽|레몽]]에게로 상속되었다. 레몽은 [[킬리키아]]를 공격했고 요한네스는 차근차근 동방원정을 성사시켰다.
 
[[1138년]] 요한네스는요안니스는 드디어 안티오키아까지 진격했고 결국 레몽의 항복을 받았다. 그는 레몽과 [[에데사의 조슬랭 2세]]등 십자군의 가신들과 연합하여 [[1138년]] 3월 [[성전 기사단]]을 구성했고 시리아의 이슬람에 대한 원정에 나섰으나 레몽와 조슬랭의 불신으로 원정에 성공하지 못했고 [[프랑크족]] 군대의 반감이 깊어져 결국 원정을 포기하고 돌아와야 했다.
 
=== 마지막 원정과 죽음 ===
수도로 돌아온 요한네스는요안니스는 내정에 전념하고 다시한번 동방에 대한 원정에 나설 준비를 하였다. 그가 동방에서 돌아온 뒤 이슬람의 유능한 장군인 [[장기 (사람)|장기]]는 [[다마스쿠스]]를 공격했고 [[십자군 국가|라틴국가]]를 위축시켰다. [[1142년]] 요한네스는요안니스는 마지막 동방원정에 나섰는데 그 해 여름 맏아들 아들 알렉시우스와알렉시오스와 둘째 안드로쿠니스가아들 안드로니코스가 그만 병에 결려 차례로 죽고 말았다. 그래도 요한네스는요안니스는 원정을 멈추지 않고 [[킬리키아]]를 거쳐 동방으로 계속 진군하여 [[안티오키아의 레몽]]에게 안티오키아를 요구했다. 레몽은 이를 거절하고 양측이 이듬해 전쟁에 들어갈 준비를 했는데 [[1143년]] 3월 요한네스는요안니스는 사냥에 나섰다가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손을 맞았고 이게 [[패혈증]]으로 번졌다. 그는 죽음을 준비하면서 셋째아들셋째 아들 이사키우스이사키오스 대신 막내아들 [[마누엘마누일 1세 콤네누스콤니노스|마누엘마누일]]을 후계로후계자로 선정하고 [[1143년]] [[4월 8일]] 죽었다사망했다.
 
== 가족관계 ==
[[파일:Byzantinischer Mosaizist um 1118 002.jpg|섬네일|150px|황후 [[헝가리의 이리니|이리니]], [[하기아 소피아]]의 [[모자이크]].]]
요안니스는 [[헝가리의 군주|헝가리 왕]] [[라슬로 1세]]의 딸 [[헝가리의 이리니|필로스카]] (나중에 그리스식으로 "이리니"로 개명함)와 [[1104년]] 결혼하였다. 황후 이리니는 [[1134년]] [[8월 13일]] 요한네스가요안니스가 동방원정에동방 원정에 나서던 중에 죽었다사망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8명의 자식이 있었다.
 
# 알렉시오스 (쌍둥이), 1122년부터 1142년까지 공동 황제
# ''마리아'' (알렉시우스와알렉시오스와 쌍둥이)
# 안드로코니코스, 형 알렉시오스가 죽은사망한곧바로 사망 (1142년)
# ''안나''
# 이사키오스, 1154년 죽음사망
# ''테오도라''
# ''에우도키아''
# [[마누일 1세 콤니노스|마누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됨즉위함 (1180년 죽음사망)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