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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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은 [[1879년]] 3월 [[평안북도]] [[박천군]]에서 부친 [[유종식]]과 모친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살 때 사촌형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체류하다 [[일본제국]]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인 성성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를 계기로 군인이 되었다.
 
유동열은 그 뒤 [[대한제국]] 육군 장교 신분으로 [[노백린]]과 [[이동휘]] 등과 비밀결사 [[효충회]]를 결성해 친일파 대신의 암살을 계획했고, [[1909년]] 대한제국 참령(소령)으로 군대를 떠난 뒤에도 서우학회와 신민회, 서북학회에 관여하는 한편,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구한국군 기병대장을 거쳐 애국계몽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했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그 배후로 지목되어 검거되기도 했다. 이런 활동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 [[베이징 시|베이징]]으로 망명한다.
 
=== 독립 운동 ===
망명한 뒤에는 독립군 자금 모집을 위해 [[베이징 시|베이징]]과 국내 각지에서 활동하다가 그는 신민회의 부회장으로 [[1911년]] 8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돼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등과 함께 최고형인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신한혁명당]],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을 창립하고, 고려군정의회를 설립, 군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 임시정부 참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