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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신은 11사단장으로 재직 당시 일어난 [[거창양민학살사건]] 관계자이기도 하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은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공비에게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산청과 함양에서 시작되어 거창에서 끝난 사건이므로, “산청·함양·거창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1&aid=0000005799 “51년 거창 양민학살사건 당시 국방장관 은폐개입”] [[문화일보]] 2002년 10월 19일</ref><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21548 "어머니 머리는 총탄에 부서졌다"] [[오마이뉴스]] 2011년 3월 16일</ref>
 
육사 교장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르친 인연으로 5.16 직후 [[외무부 장관]]을 했고 1963년 8월 9일, [[한독 관계|서독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 <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807003292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08-07&officeId=00032&pageNo=1&printNo=5472&publishType=00020| 제목 = 瑞典大使에- 劉載興씨任命 | 날짜 = 1963-08-07 | 출판사 = 경향신문 |인용문 =西獨大使에는 崔德新前外務部長官이 決定되어 있다. )}}</ref><ref>{{뉴스 인용 |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8100020920102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08-10&officeId=00020&pageNo=1&printNo=12857&publishType=00020 |제목=주서독대사에 최덕신씨 발령 |출판사= 동아일보|날짜= 1963-08-10|쪽=1 }}</ref> 서독 대사 이후 67년부터 천도교 교령으로 활동했다. 또 통일원 고문, 주 [[베트남]] 공사, 한중일보 사장([[1972년]]) 등을 지냈다.<ref>약력: 외교통상부 [http://www.mofat.go.kr/mofat/mk_a007/mk_b041/mk_c90/1172562_27881.html 제9대 외무부장관 최덕신 프로필]{{깨진 링크|url=http://www.mofat.go.kr/mofat/mk_a007/mk_b041/mk_c90/1172562_27881.html }}</ref>
 
서독 대사를 지내던 1967년, 중앙정보부가 독일에서 활동 중인 지식인들을 간첩으로 지명·납치한 '동백림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불편한 사이가 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동백림 사건이 국제적인 항의와 외교적인 문제로까지 비화되자 최덕신에 책임을 돌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계기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됐고 유신 이후 정권과 멀어진 1976년 [[미국]]으로 망명했다.<ref>이수강,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15615 최덕신씨 북한행의 '정설'?], 오마이뉴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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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19-02-17}}</ref>
 
최덕신은 원래반북반공인사로 철저한 반북반공인사였다. 그러나분류되었으나 미국 체류 중 6.25 때 납북된 부친의 묘소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방북한 그는 애국열사릉에 잘 모셔져 있는 부친 최동오의 묘를 보고 마음이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최동오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 운동가였다.
 
최덕신의 맏아들 최건국이 사망 전에 밝힌 최덕신의 북한행 이유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나 미국에 나가 살면서 김일성 주석의 통일토론 제의를 수락해 76년 처음 북한을 방문했다. 아버지는 2년 뒤인 78년 다시 북한을 방문했으며 그 뒤부터는 거의 매년 방북하면서 김 주석을 만났고 북한 체제를 목격하게 된 것 같다. 직접적인 계기는 김주석의 '인력(引力)' 때문이었다고 본다." <ref>{{저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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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최덕신.류미영 부부는 2남 3녀를 뒀는데, 장남 최건국은 송두율과 함께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귀국하지 못하고 2016년 독일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 살던 차남 [[최인국]]은 북한에 영구 거주하기 위해 2019년 7월 6일 평양에 도착했다.<ref>{{저널 인용
|url=https://news.v.daum.net/v/20190707114611123
|제목='월북' 류미영 아들 최인국, 영주 위해 입북.."방북신청 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