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17번째 줄: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세례명]] : 토마)
}}
'''유진오'''(兪鎭午, [[1906년]] [[5월 13일]] ~ [[1987년]] [[8월 30일]])는 [[일제시대]]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민국]]의 [[소설가]], [[법학자]], 교육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기계 유씨|기계]](杞溪)이고 호(號)는 현민(玄民)이며 [[한성부]]에서 출생하였다. [[일제시대]] 때에는 [[보성전문학교]]의 교수로 지냈고 [[고려대학교]]의 창립 초기 멤버이다멤버이며, [[고려대학교]]의 총장을 지냈다.
 
[[카프]]가 민중문제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불참하였으며 경성제대에 결성되었던 경제연구회라는 마르크스주의 연구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친일 사회주의 좌파 문학인으로 활동했으나 [[태평양 전쟁]] 이후 친일 칼럼, 논설, 친일 어용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에 참여하여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제헌 헌법]]을 입안하였으며, 정치 활동으로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기간 중 [[민국당]]과 [[민주당]]에 참여하였으며, [[1959년]] [[장택상]] 등과 함께 재일동포 북송 반대운동에 동참했다. 그 뒤 [[윤보선]]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 계열의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언론, 법률 활동 외에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 기간 중 야당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했다. 역사가[[신민당]]총재를 지냈으며 1969년 [[한홍구3선개헌]]이 통과되자 충격을 받고 당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정계에서 물러났으며 [[박정희정부]]하에서는 줄곧 야당지도자로 정부 비판에 앞장섰다. 그러나 [[전두환정부]]출범 이후 [[국정자문회의]]위원과 [[국토통일원]]고문을 지내면서 외할아버지이기도비판을 하다받았다.
 
== 생애 ==
=== 생애 초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