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칼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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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칼뱅'''({{llang|fr|Jea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은 [[종교 개혁]]을 이끈 [[프랑스]] 출신의 [[개혁교회]] [[기독교 신학자|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이다. [[영어]]식으로 '''존 칼빈'''({{llang|en|John Calvin}}) 또는 '''요한 칼빈'''으로 불리기도 한다. 종교개혁의 2세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ref>[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John-Calvin John Calvin, Encyclopedia Britannica]</ref> [[기독교]] 사상 중 하나인 [[칼뱅주의]]([[개혁주의]])의 개창자로, [[마르틴 루터]]·[[울리히 츠빙글리|츠빙글리]]가 시작한 [[종교 개혁]]을 완성하였으며, 저서 《[[기독교 강요]]》(1536)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역사와 문학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2009년 그의 탄생을 기념하여 여러 국가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요한칼빈탄생500주년기념사업회]] 주최로 학자들이 대규모 학술대회를 열었다.<ref>{{웹 인용 |url=http://www.cts.tv/news/news_view.asp?page=3&PID=P368&DPID=83159&s_part=0&s_str=%EC%B9%BC%EB%B9%88&c_field=&c_period=# |제목=CTS 뉴스, "칼빈500주년 기념대회 기자회견", 기사입력: 2008-10-23 |확인날짜=2018-11-09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32733/http://www.cts.tv/news/news_view.asp?page=3&PID=P368&DPID=83159&s_part=0&s_str=%EC%B9%BC%EB%B9%88&c_field=&c_period=# |보존날짜=2016-03-04 |깨진링크=예 }}</ref>
 
== 출생과 학창시절(1509년-15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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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슈 ===
1523년 8월에 칼뱅과 몽모르 가문의 소년 몇이 공부를 더하기 위해 파리로 이주했다. 칼뱅이 처음 [[파리 (도시)|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삼촌인 리샤르의 집에 머물렀으나 두 달 후에 [[마르슈 학교]]<ref>이 학교는 대학교육을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인문주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교육 과정은 처음에 [[문법]], [[수사학]] 그리고 [[논리학]](소위 [[3학]])에 중점을 두었으며, 그 이후에 [[수학]], [[기하학]], [[천문학]] 그리고 [[음악]](소위 [[4과]])에 중점을 두었다.</ref> 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마뚜랭 꼬르디에르]]가꼬르디에르가 [[라틴어]] 문법을 가르쳤다.<ref>Ganoczy 2004, pp. 3–4; Cottret 2000, pp. 12–16; Parker 2006, p. 21. McGrath 1990, pp. 22–27</ref> 꼬르디에르는 근대식 교수법으로 유명한데, 그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를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칼뱅은 이 학교에 몇 달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꼬르디에르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1562년 꼬르디에르는 칼뱅의 요청으로 제네바로 옮겨와 가르쳤다.
=== 몽테귀 컬리지 ===
[[파리 (도시)|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칼뱅은 자신의 이름을 요아니스 칼비누스({{llang|la|Ioanis Calvinus}})로 개명했는데, 이로 인해 이후 장 칼뱅({{llang|fr|Jean Calvin}})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523년 말 즈음에 그는 [[파리 대학교]]의 몽테귀 컬리지에서 수학했으며 [[인문주의|인문학자]]이자 [[종교개혁]]에 많은 영향을 준 [[에라스무스]]와 [[라블레]] 등에게 배울 수 있었다. 칼뱅이 재학하였던 1514년부터 1528년까지 몽떼귀 컬리지의 교장은 [[피에르 탕페트]]였다탕페트였다. 그는 보수적인 학자 [[노엘 베다]]의베다의 계승자였다.<ref>Cottret 2000, pp. 17–18; Parker 2006, p. 22–23</ref> 칼뱅은 여기서 [[수사학]] 등을 배웠다. 당시 프랑스는 [[공동생활형제단]]의 [[근대적 경건]] 운동과 [[유명론]] 등이 [[신학]]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칼뱅은 콥(Cop) 가문의 몇 사람과 친분을 가졌다. [[프랑수아 1세 (프랑스)|프랑수아 1세]]의 왕실 [[의사]]였던 기욤 콥(Guillaume Cop)은 당대의 다양한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 사상을 가진 그룹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의 아들 사형제는 칼뱅의 친구였다. 칼뱅은 콥 가문을 드나들면서 이러한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 칼뱅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그의 사촌인 피에르 [[로베르 올리베탕]] 등이 있다.{{출처|날짜=2007-8-16}} 1528년 파리에서 학업을 시작한 [[로욜라]]<ref>[[로마 가톨릭]]의 [[예수회]] 창시자</ref> 도 역시 장 칼뱅과 비슷한 시기에 이 몽떼귀 학교에 다녔는데, 그 두 사람이 만났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 법학 공부 ===
[[파일:Jean Calvin.png|섬네일|왼쪽|젊은 시절의 장 칼뱅]]
1527년 9월 27일 장 칼뱅은 두 번째 [[성직록]] 장학금을 받았다. 이것은 누와용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인 [[마르트빌]](Martheville)의 [[생 마르탱]](Saint Martin) 사제직에서 생기는 수입이었다. 1527년 칼뱅의 아버지는 누와용의 교회 참사회와 직무상의 일로 인해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는 교회와의 마찰로 장학금이 취소될 지 모른다는 우려와 아들의 출세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칼뱅에게 [[신학]]보다는 [[법학]]을 공부하라고 권유했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칼뱅은 1528년 초 무렵 유명한 법학자 [[피에르 드 레스뚜왈]]이레스뚜왈이 강의하는 [[오를레앙 대학교]]로대학교로 옮겼다. 레스뚜왈의 유식함은 칼뱅에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오를레앙에서 칼뱅은 [[멜키오르 볼마르]]로부터볼마르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웠다. 이 기간에 사귄 다른 친구들로는 [[프랑수아 다니엘]], [[프랑수아 드 코낭]], [[니콜라 뒤쉐맹]]뒤쉐멩 등이 있다. .<ref>Parker 1975, p. 15.</ref> [[1529년]] 여름에 칼뱅은 친구 프랑수아 다니엘, 니콜라 뒤쉐맹과 함께 [[부르주 대학교]]로대학교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는 역사학파의 설립자이며 법학자이자이자법학자이자 인문주의자인 이탈리아 사람 [[안드레아 알키아티]]의알키아티의 강의를 들었다.<ref>Cottret 2000, pp. 20–24; Parker 1975, p. 22–25</ref>
 
칼뱅은 1531년 3월 니꼴라 뒤쉐맹의 <반박문>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갔다. 그는 1531년 3월 6일에 이 책의 서문을 썼다. 이것이 칼뱅의 첫 출판물이 되었다. 칼뱅은 파리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가 매우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누와용으로 달려갔다. 그의 아버지는 1531년 5월 26일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사망하기 2년 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되었기 때문에 칼빈의 형 샤를르는 아버지를 교회 묘지에 매장하기 위해 교회의 참사회와 협상하여야 했다. 1530년 파리로 돌아간 칼뱅은 [[포르떼 대학]]에대학에 정착하여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1532년 4월 4일 칼뱅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를 주석하여 출판했다. 1532년 그는 다시 오를레앙으로 돌아와 법률 공부를 마쳤다.
 
=== [[기독교 강요]] ===
[[만성절]](모든 성인의 날)인 1533년 11월 1일, 새 학기를 시작하는 [[파리 대학교]] 학장에 취임하는 공식 석상에서 니꼴라 콥은 선생님들의 고위 성직자들 앞에 두고 기독교적 철학, 그리고 법과 복음의 관계 등에 관해 비판적인 연설을 하게 되었다. 이 연설문은 프랑스 [[종교 개혁|종교개혁]]의 관건이 되었으며 [[마르틴 루터|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이 가미되어 있었는데 이 연설문을 칼뱅이 작성했다. 콥의 학장 취임 연설은 칼뱅이 종교개혁가로 나선 출발점이 된다.<ref>[[오덕교]]《종교개혁사》(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P226)</ref> 파리 국회는 연설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며, 해명을 위해 소환 당하기 전에 니꼴라 콥은 도시를 빠져나갔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저주받은 루터 이단”을 박해하기로 결심했다. 칼뱅도 자신의 도서들과 편지들을 남겨 둔 채 당국에 체포되기 전에 도시를 몰래 빠져나갔다. 그는 파리 근교에 머물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그리고 1533년 말 혹은 1534년 초 즈음에 파리 남부의 [[생통쥬]] 지방으로 갔다. 칼뱅은 샤를 데스뻬비여(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상당 기간 [[클레]]교구 목사이자 앙굴렘에 있는 [[개신교]] 교회의 [[참사회원]]이었던참사회원이었던 [[루이 뒤 티예]](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칼뱅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구상하였다.
 
1534년 4월 칼뱅은 80세가 된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르페브르]](Jacques Lefèvre d'Étaples, 1536년 사망)를 방문하기 위해 [[네락]](Nérac)으로 갔다. 르페브르는 마지막 시간을 네락에 있는 앙굴렘의 마르거리뜨 소유의 성에서 보내고 있었다. 칼뱅은 또한 [[클레락]](Clairac)의 수도원에 살고 있었던 궁정 설교자 제라르 루셀도 방문하였다. 1534년에 칼뱅은 여러 가지 [[성직록]]에서성직록에서 비롯된 수입을 포기했다. 그 당시에는 25세가 되어 공식적으로 교회 봉사에 입문하지 않으면 성직록을 포기하는 것이 관례였다.
 
칼빈은 파리 근교에 머무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왈도파 교인인 에띠엔느 들 라 포르쥬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라 포르쥬는 루터의 글을 탐독하였고, 종교개혁사상을 전파하였으며 성경과 복음적인 팸플릿을 보급하였고, 네덜란드로부터 온 종교적 피난민들에게 항상 집을 개방하곤 하던 인물이었다. 칼뱅은 이러한 라 포르쥬를 통해 종교개혁에 눈뜨고 회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곳에서 칼뱅은 아마도 [[플람스]]의 설교자이자 유명한 [[재세례파]]교회의 지도자인 [[깡뗑 티프리]]를티프리를 만났을 것이다. 파리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칼뱅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그가 칼뱅과 만나기로 한 약속은 성사되지 못했다. 세르베투스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뱅은 뒤 띠예와 함께 끌레를 경유하여 [[푸아티에]]에 있는 지지자들에게 갔다. 그리고 칼뱅은 그 곳 도시 외곽 [[생브누아]]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칼뱅은 푸와티에르를 떠나 뒤 띠예와 함께 오를레앙으로 여행 했으며 <영혼불멸>을 집필했다.
 
1534년 10월 17일-18일 밤 [[성만찬]]때 면병과 포도주가 [[예수]]의 [[그리스도의 몸|몸]]과 [[그리스도의 피|피]]로 변한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변화]] 교리에 반대하는 과격한 벽보가 파리 전체(심지어는 왕의 침실 문에도)와 전국 각지에 나붙었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플래카드 사건]], 즉 [[벽보 사건]]이다. 이 문서의 기안자는 [[앙투안 마르꾸르]]였다마르꾸르였다. 그는 [[리옹]]에서 추방된 후 [[뇌샤텔]]의 [[주교]]가 되었다.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 (프랑스)|프랑수아 1세]]는 [[인문주의자]] [[기욤 뷔데]]의뷔데의 권고 등으로 인해 일단의 조치를 취했으며 파리에서의 상황은 점점 더 험악해져 갔다. 11월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몇 달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칼뱅의 후원자요 절친한 친구인 [[에티엔 들 라 포르쥬]]도포르쥬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뱅과 뒤 띠예는 개신교에 대한 탄압을 피해,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바젤]]로 갔다. 칼뱅은 바젤에서 마르티아누스 루카누스(Martianus Lucanus)라는 가명으로 지냈다. 당시 그의 동료로는 [[바젤]]의 개혁가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의 후계자 [[오스발트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와 스트라스부르크의 목사인 [[볼프강 카피토]] 등이 있다.<ref>Ganoczy 2004, pp. 7–8; Cottret 2000, pp. 63–65, 73–74, 82–88, 101; Parker 2006, pp. 47–51; McGrath 1990, p. 62–67</ref> 칼뱅은 이 외에도 학자 [[세바스티안 뮌스터]], 변호사 [[보니파키우스 아메르바흐]], 미래의 제네바 동지인 [[피에르 비레]] 등과 친분을 쌓았다. 1536년 2월에는 [[하인리히 불링거]]<ref>하인리히 불링거는 [[울리히 츠빙글리|츠빙글리]]의 계승자로서 여러 개신교 도시를 대표하는 사절단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ref> 와도 사귀게 되었다. 1535년 6월 바젤에 정착하여 1536년에 7월 12일에 사망한 [[에라스무스]]를 칼뱅이 만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535년 6월 4일에는 올리베땅에 의해 [[불어 성서 번역]]본이번역본이 출판되었다. 라틴어로 된 추천 서문은 칼뱅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으며 [[신약성경]] 앞에 나오는 두 번째 추천 서문은 익명이지만 1545년 이후부터는 칼뱅의 것으로 간주된다. 칼뱅은 이 번역본의 개정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에 [[칼뱅]]은 고대 교회의 [[교부]]중 한 명인 [[크리소스톰]] 주교의 설교집에 추천 서문을 썼으며 《[[기독교 강요]]》의 초판 작업도 계속해 나갔다. 《[[기독교 강요]]》는 1535년에 완성되었다. 칼뱅은 이 책을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하였다. 《[[기독교 강요]]》의 라틴어 초판은 1536년 3월 바젤에서 출판되었으며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이 작품으로 칼뱅은 종교개혁의 주도적인 신학자가 되었다.
 
=== 망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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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년 당시의 제네바는 약 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1526년 [[사보이아 공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으며 [[베른]]과 [[프라이부르크]]의 주들과 시민연대라 불리는 상호 방위 동맹을 맺고 있었다.
 
[[제네바]]의 [[로마 가톨릭]] [[주교]] [[피에르 들 라 봄]]은봄은 주로 사부와의 원조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네바에서 사부와 공작의 세력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1532년]] 이후 [[개신교]] 주가 된 [[베른]]을 계기로 삼아 [[기욤 파렐]]과 그를 돕던 사람들은 1532년 10월 이래 줄곧 [[제네바]]에 [[종교개혁]]운동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였다.
 
베른의 도움에 힘입어 제네바는 이 시기에 사부와의 공작과 [[로마 가톨릭 교회]] 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데 성공했다. 1536년 5월 21일에 제네바의 모든 시민은 [[기욤 파렐|파렐]]의 지휘 아래 종교개혁을 수용하기로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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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젤에서 몇 주일을 지낸 후 [[기욤 파렐|파렐]]은 뇌샤텔로 옮겨 갔고 그곳에서 목사가 되었다. 칼뱅은 공부에만 전념하면서 <[[기독교 강요]]>의 두 번째 판을 준비하기 위해 바젤에 남아 있기로 했다. 그러나 1538년 9월에 [[마르틴 부서]]와 볼프강 카피토는 그에게 슈트라스부르크로 올 것을 여러 차례 종용했다. 칼뱅은 마침내 부서의 강요에 승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400-500명의 프랑스 망명객으로 새로이 구성된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539년]] 칼뱅은 또 그 지역의 [[김나지움]]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신약성서]] 해석을 가르쳤다. 슈트라스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칼뱅은 몇 가지 중요한 일들을 해냈다. 1539년에는 <[[기독교 강요]]>의 두 번째 라틴어판을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1536년 초판의 3배 분량이었다. [[1540년]] 그의 많은 주석 가운데 최초의 것인 <로마서 주석>이 나왔다. 이 기간에 칼뱅은 여러 사람들의 요청에 부합하고자 평신도들에게 [[성만찬]]의 의미를 설명하는 글도 썼다. 이 <성만찬 소고>는 1541년 제네바에서 출판되었다. 쟝 스또르되르는 [[재세례파]]였지만 칼뱅의 영향을 받아 부인과 두 아이(아들 하나 딸 하나)와 함께 슈트라스부르크의 회중에 합류했다. 1540년 봄에 그가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1540년 8월 6일에 칼뱅은 그의 부인이었던 이델레뜨 드 뷔르와 결혼했다. 이미 1539년 5월 19일에 칼뱅은 파렐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고 이 일은 여러 번 성사될 뻔하기도 했다고 썼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이 가능성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칼뱅과 이델레뜨의 결혼은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정식 혼인으로 서약되었으며 아마도 그것은 [[기욤 파렐|파렐]]에 의해 [[예배]] 시간에 승인되었을 것이다. 1542년 7월 28일 칼뱅과 이델레뜨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이름은 자크(Jacques)였다. 하지만 조산아였던 자크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이델레뜨 역시 1549년 3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쟝 스또르되르]]는 [[재세례파]]였지만 칼뱅의 영향을 받아 부인과 두 아이(아들 하나 딸 하나)와 함께 슈트라스부르크의 회중에 합류했다. 1540년 봄에 그가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1540년 8월 6일에 칼뱅은 그의 부인이었던 [[이델레뜨 드 뷔르]]와 결혼했다.
 
이미 1539년 5월 19일에 칼뱅은 파렐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고 이 일은 여러 번 성사될 뻔하기도 했다고 썼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이 가능성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칼뱅과 이델레뜨의 결혼은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정식 혼인으로 서약되었으며 아마도 그것은 [[기욤 파렐|파렐]]에 의해 [[예배]] 시간에 승인되었을 것이다.
 
1542년 7월 28일 칼뱅과 이델레뜨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이름은 자크(Jacques)였다. 하지만 [[조산아]]였던 자크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이델레뜨 역시 1549년 3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칼뱅은 아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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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살아생전에 그녀는 나의 직무를 완성시키는 조력자였습니다. 그녀는 아주 사소하게라도 나의 길을 방해한 적이 없습니다.|칼뱅|삐에르 비레에게 보낸 4월 7일자 편지}}
 
그는 또한 [[기욤 파렐|파렐]]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도 그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임종시에 그녀가 자신의 첫 번째 결혼에서 생긴 아이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칼뱅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에게 그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들처럼 돌보겠노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칼뱅이 슈트라스부르크에 머물던 시기에 제네바와 가졌던 접촉들에 대해 살펴보자. [[기욤 파렐|파렐]]에게 보낸 [[1538년]] 10월 24일자 편지에서<ref>CO 10b:273-76</ref> 칼뱅은 혼란이 지배하는 제네바의 상황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 [[기욤 파렐|파렐]]과 칼뱅의 후원자들은 [[기욤 파렐|파렐]]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을 기에르멩(Guillermin)<ref>기욤 [[기욤 파렐|파렐]]의 추종자라는 뜻</ref> 이라고 불렀다. 이들 중에는 시의회 의원 아미 페렝(Ami Perrin)과 1536년 5월에 설립된 라 리브(La Rive) 학교의 학장인 앙투안 소니에르, 그리고 라 리브 학교와 [[1537년]]부터 관련을 맺고 있던 마뚜랭 꼬르디에르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새로 부임한 목사들<ref>[[앙리 드 라 마레]](Henri de la Mared) 외에 [[자크 베르나르]], [[장 모랑]], [[앙투안 마르쿠르]] 등이 그 목사들이다.</ref> 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지도 알고 싶어 했다.
 
[[기욤 파렐|파렐]]에게 보낸 [[1540년]] 3월 29일자 편지에서<ref>CO 11:30-31</ref> 칼뱅은 제네바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의 편지를 기다려 왔노라고 썼다. 2월에 [[아르띠뀔랑]] 파(Articulants)<ref>“매국노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1539년에 제네바에 상당히 불리한 협약을 베른과 맺은 제네바 시의원들을 가리킴</ref> 와 기에르멩 파들은 서로간의 의견 차이를 극복했다.
마지막으로, 칼뱅이 슈트라스부르크에 머물던 시기에 제네바와 가졌던 접촉들에 대해 살펴보자. [[기욤 파렐|파렐]]에게 보낸 [[1538년]] 10월 24일자 편지에서<ref>CO 10b:273-76</ref> 칼뱅은 혼란이 지배하는 제네바의 상황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
또한 칼뱅은 제네바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그의 귀환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하루에도 천 번씩 죽었던 그 십자가(제네바의 1차 체류) 위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식으로 백 번 죽는 게 낫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자신을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게 하려는 사람들을 말려달라고 [[기욤 파렐|파렐]]에게 호소했다. 1540년 9월 21일에 제네바 시의회는 열렬한 기에르멩 파의 한 사람인 아미 페렝에게 칼뱅을 제네바에 돌아오게 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제네바 시의회는 10월 13일에 귀환을 요청하는 편지를 칼뱅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간단한 공식 서한이 [[10월 22일]]에 보내졌다. 이 편지 때문에 이틀 동안 칼뱅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칼뱅은 10월 23일에 답장을 보내서 제네바 교회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했다. 하지만 정말 딜레마에 빠졌다. 한편으로는 제네바로 돌아오라는 요구에 대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정말 순종하고 싶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을 간단하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기욤 파렐|파렐]]과 칼뱅의 후원자들은 [[기욤 파렐|파렐]]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을 [[기에르멩]](Guillermin)<ref>기욤 [[기욤 파렐|파렐]]의 추종자라는 뜻</ref> 이라고 불렀다. 이들 중에는 시의회 의원 [[아미 페렝]](Ami Perrin)과 1536년 5월에 설립된 [[라 리브]](La Rive) 학교의 학장인 [[앙투안 소니에르]], 그리고 라 리브 학교와 [[1537년]]부터 관련을 맺고 있던 [[마뚜랭 꼬르디에르]]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새로 부임한 목사들<ref>[[앙리 드 라 마레]](Henri de la Mared) 외에 [[자크 베르나르]], [[장 모랑]], [[앙투안 마르쿠르]] 등이 그 목사들이다.</ref> 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지도 알고 싶어 했다.
 
[[기욤 파렐|파렐]]에게 보낸 [[1540년]] 3월 29일자 편지에서<ref>CO 11:30-31</ref> 칼뱅은 제네바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의 편지를 기다려 왔노라고 썼다. 2월에 [[아르띠뀔랑]] 파(Articulants)<ref>“매국노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1539년에 제네바에 상당히 불리한 협약을 베른과 맺은 제네바 시의원들을 가리킴</ref> 와 기에르멩 파들은 서로간의 의견 차이를 극복했다.
또한 칼뱅은 제네바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그의 귀환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하루에도 천 번씩 죽었던 그 십자가(제네바의 1차 체류) 위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식으로 백 번 죽는 게 낫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자신을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게 하려는 사람들을 말려달라고 [[기욤 파렐|파렐]]에게 호소했다.
 
1540년 9월 21일에 제네바 시의회는 열렬한 기에르멩 파의 한 사람인 아미 페렝에게 칼뱅을 제네바에 돌아오게 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제네바 시의회는 10월 13일에 귀환을 요청하는 편지를 칼뱅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간단한 공식 서한이 [[10월 22일]]에 보내졌다. 이 편지 때문에 이틀 동안 칼뱅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칼뱅은 10월 23일에 답장을 보내서 제네바 교회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했다. 하지만 정말 딜레마에 빠졌다. 한편으로는 제네바로 돌아오라는 요구에 대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정말 순종하고 싶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을 간단하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인용문2|언제나 목사는 부르심을 받은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리고 내적인 확신과 신자들의 동의 없이는 그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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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그러나 제 자신의 주인이 제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저는 제 심장을 도려내어 희생 제물로 주님께 바칩니다.|칼뱅|[[기욤 파렐|파렐]]에게 보낸 1540년 10월 24일자 편지<ref>{{인용문2|... sed quoniam non esse mei iuris memini, cor meum velut mactatum Domino in sacrificium offero.|CO 11, 100|Herminjard 4, 339.}}</ref>}}
 
칼뱅의 좌우명이 된 이 말은 그의 기념주화에 그림으로 새겨지게 되었다. 그 기념주화에서는 심장을 들고 있는 그의 두 손이 그려져 있고 “즉시, 그리고 신실하게”(prompte et sincere)라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다. 1541년 5월 1일에 제네바 시의회는 칼뱅에게 내려졌던 금지령을 폐지하고 만장일치로 칼뱅을 다시 청빙하기로 결정했다. 칼뱅, [[기욤 파렐|파렐]], 소니에르, 그리고 다른 몇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받들어졌다. 칼뱅은 마침내 1541년 9월에 제네바를 향해 출발했다.
 
1541년 5월 1일에 제네바 시의회는 칼뱅에게 내려졌던 금지령을 폐지하고 만장일치로 칼뱅을 다시 청빙하기로 결정했다. 칼뱅, [[기욤 파렐|파렐]], 소니에르, 그리고 다른 몇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받들어졌다. 칼뱅은 마침내 1541년 9월에 제네바를 향해 출발했다.
 
== 두 번째 제네바 체류 시절(1542년-1564년) ==
[[파일: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tif|섬네일|''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1597]]
당초 칼뱅은 제네바에 임시로 머물 계획이었다. 하지만 제네바 시의회가 자신의 제안대로 교회법 초안을 작성하겠다고 결정하자 최선을 다해 언제나 제네바의 종이 되겠다고 약속해버렸다. 여섯 명으로 구성된 시의회와 칼뱅, 그리고 또 다른 네 명의 제네바 목사들은 새로운 교회법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9월 26일 새로운 안을 시의회에 제출했다. 비록 칼뱅의 생각이 모두 포함된 것은 아니었지만 1541년의 교회법은 제네바 시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 교회법은 1547년에 증보되었으며 1561년에 상당 부분 수정되었다. 그동안에 칼뱅의 부인이 제네바로 오는 일정과 짐을 옮기는 일정이 잡혔다. 그리고 칼뱅은 다시 제네바의 목사직을 맡기로 했다. 자신이 돌아온 후 첫 예배 시간에 사람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많은 기대와 관심을 모았지만 칼뱅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단지 직분자로서의 의무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리고 1538년에 중단되었던 성경 본문에서부터 다시 강해 설교를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은 단지 직무상의 중단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당초 칼뱅은 제네바에 임시로 머물 계획이었다. 하지만 제네바 시의회가 자신의 제안대로 교회법 초안을 작성하겠다고 결정하자 최선을 다해 언제나 제네바의 종이 되겠다고 약속해버렸다.
 
교회법이 제네바 시의회에서 승인된 다음날인 1541년 11월 21일에 시민법을 제정하기 위해 시의회는 세 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 위원을 임명했다. 칼뱅도 이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1543년 1월 28일에 제네바 총회는 재판에 관한 사항을 제외하고는 시민법을 채택하였으며 그 제외된 부분도 1544년 초에 채택되었다. 교회법을 개정하고 시민법을 제정하는 등 칼뱅의 귀환은 시의 여러 가지 행정들을 처리하려는 진지한 노력으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먼저 시의회와 교회의 역할을 정의해야 하는 문제, 또 그 도시에 새로이 도입된 엄격한 생활방식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관련된 문제를 들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구 제네바 시민들인 '제네바 출신들'과 점점 하나가 되어 이 도시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에 반대하는 당을 형성했다. 제네바에 새로 도입된 더욱 엄격한 생활방식에 대해 저항이 있었음을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여섯 명으로 구성된 시의회와 칼뱅, 그리고 또 다른 네 명의 제네바 목사들은 새로운 교회법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9월 26일 새로운 안을 시의회에 제출했다. 비록 칼뱅의 생각이 모두 포함된 것은 아니었지만 1541년의 교회법은 제네바 시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 교회법은 1547년에 증보되었으며 1561년에 상당 부분 수정되었다.
 
카드 제조사의 사장을 역임하고 소의회의 일원이었으며 포병대 대위인 삐에르 아모의 아내가 1545년 1월에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인해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결혼 생활은 끝이 났고 아모는 재혼을 허가 받았다. 1546년 1월 26일 아모는 칼뱅이 자신의 최근 이혼 소송에서 반대한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칼뱅의 교리와 생활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아모는 체포되었다. 소의회는 온건한 처벌을 내려야 할지 아니면 강력한 처벌을 내려야 할지 선택을 하지 못해 결국 이 문제를 200인 의회에 상정했다. 1546년에 춤을 금지하는 법을 위반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문제는 칼뱅이 제네바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 일에 관련된 사람들 중에는 시장관인 앙블라르 꼬르느(Amblard Corne)와 포병대 대장인 아미 페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동안에 칼뱅의 부인이 제네바로 오는 일정과 짐을 옮기는 일정이 잡혔다. 그리고 칼뱅은 다시 제네바의 목사직을 맡기로 했다.
교회치리회에서 페렝의 아내는 치리회 회원들을 향해 폭언을 퍼부었는데, 그들이 자기 집안인 파브르 가문(the Favres)에 대해 뭔가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회치리회 회원들은 그녀 아버지의 간통 문제에 대해서도 일련의 조처를 취하게 되었다. 1546년 8월에는 페렝-파브르 가문과 더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아벨 푸팽]](Abel Poupin)이 집례한 아미 페렝의 친척 결혼식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을 듣고 있지 않던 신랑이 “예”라는 대답 대신 머리를 내저어버렸다. 곁에 서 있던 아미 페렝은 웃어버렸고 이 둘은 시의회로부터 처벌을 받았다.
 
자신이 돌아온 후 첫 예배 시간에 사람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많은 기대와 관심을 모았지만 칼뱅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단지 직분자로서의 의무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리고 1538년에 중단되었던 성경 본문에서부터 다시 강해 설교를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은 단지 직무상의 중단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교회법이 제네바 시의회에서 승인된 다음날인 1541년 11월 21일에 시민법을 제정하기 위해 시의회는 세 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 위원을 임명했다. 칼뱅도 이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1543년 1월 28일에 제네바 총회는 재판에 관한 사항을 제외하고는 시민법을 채택하였으며 그 제외된 부분도 1544년 초에 채택되었다.
 
교회법을 개정하고 시민법을 제정하는 등 칼뱅의 귀환은 시의 여러 가지 행정들을 처리하려는 진지한 노력으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먼저 시의회와 교회의 역할을 정의해야 하는 문제, 또 그 도시에 새로이 도입된 엄격한 생활방식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관련된 문제를 들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구 제네바 시민들인 '제네바 출신들'과 점점 하나가 되어 이 도시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에 반대하는 당을 형성했다.
 
제네바에 새로 도입된 더욱 엄격한 생활방식에 대해 저항이 있었음을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카드 제조사의 사장을 역임하고 소의회의 일원이었으며 포병대 대위인 [[삐에르 아모]]의 아내가 1545년 1월에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인해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결혼 생활은 끝이 났고 아모는 재혼을 허가 받았다.
 
1546년 1월 26일 아모는 칼뱅이 자신의 최근 이혼 소송에서 반대한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칼뱅의 교리와 생활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아모는 체포되었다. 소의회는 온건한 처벌을 내려야 할지 아니면 강력한 처벌을 내려야 할지 선택을 하지 못해 결국 이 문제를 200인 의회에 상정했다.
 
1546년에 춤을 금지하는 법을 위반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문제는 칼뱅이 제네바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 일에 관련된 사람들 중에는 시장관인 [[앙블라르 꼬르느]](Amblard Corne)와 포병대 대장인 아미 페렝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회치리회에서 페렝의 아내는 치리회 회원들을 향해 폭언을 퍼부었는데, 그들이 자기 집안인 파브르 가문(the Favres)에 대해 뭔가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회치리회 회원들은 그녀 아버지의 간통 문제에 대해서도 일련의 조처를 취하게 되었다.
 
1546년 8월에는 페렝-파브르 가문과 더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아벨 푸팽]](Abel Poupin)이 집례한 아미 페렝의 친척 결혼식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을 듣고 있지 않던 신랑이 “예”라는 대답 대신 머리를 내저어버렸다. 곁에 서 있던 아미 페렝은 웃어버렸고 이 둘은 시의회로부터 처벌을 받았다.
게다가 페렝 부인의 삼촌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결혼식 전날에 페렝의 어머니는 싸움을 하던 중에 가족 한 사람을 때려서 문제를 일으켰다. 그녀는 교회치리회 앞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었지만 달아나 버렸다.
 
1547년 9월 20일에 시의회 회의석상에서 아미 페렝은 자기 아내와 장인의 수감과 관련하여 시의회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페렝 역시 체포되었고 10월 9일에는 그의 의장으로서의 직분이 박탈되었다. 그에 대한 소송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다음과 같은 고발이 접수되었다. 5월에 베른 대표로 파리에서 열린 앙리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페렝은 그곳에서 황제 칼 5세의 공격에 대비하여 베른과 제네바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수백의 기마병 지휘권을 페렝에게 주겠다는 추기경 뒤 벨레(Du Bellay)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베른은 페렝을 지지했으며 페렝을 고발했던 [[로랑 메그레]](Laurent Maigret) 역시 페렝이 파리에 있던 바로 그 시기에 프랑스 왕실의 도움을 얻고자 했음을 폭로했다. 메그레도 체포되었다. 시의회 내에서의 토론은 격렬해졌다. 11월 29일에 페렝은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으나 메그레는 감옥에 남겨졌다.
 
1548년 가을에 칼뱅은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칼뱅은 로잔에서 [[카인]](Cain)이라 불리고 있었고 곧 제네바에서 축출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11월 선거에서 칼뱅의 대적들이 승리했다. 이제 그들은 사법부와 관련된 주요 관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칼뱅은 다가오는 시 장관 선거가 시 정부 내에서 완전한 개혁을 창출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1549년 1월 18일에 시의회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시 전체에 복음을 따라 [[칼뱅주의|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종교법을 지키도록 요구했다<ref>CO 13:158-60</ref>. 모든 사람에게 기독교적인 생활을 준수하며 교회 예배에 충실히 출석하라고 간곡히 권고했다.
규정 준수 여부를 감독하던 사람들은 임무를 책임감 있게 수행해야만 했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모범을 보이도록 요구되었다. 목사들의 직위 해제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신중히 처리하도록 했다. 포고문은 그 다음 예배 전에 공포되어야 했다. 칼뱅이 염려한 대로 1549년 2월에 아미 페렝은 수석 시 장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555년 2월에 거행된 선거는 칼뱅의 추종자들에게 완전한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 4명의 시 장관 모두 칼뱅을 지지하였으며 페렝의 추종자들인 제네바 출신들은 모든 정치 일선에서 영향력을 잃어 버렸다. 그 다음 달에 다수의 프랑스 망명객들(약 50명)이 제네바 시민권을 취득했다. 페렝 가문을 포함한 오랜 제네바 가문들은 많은 프랑스 망명객들이 자신들의 도시에 정착하는 것을 수용할 수 없음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1555년 5월 6일 시의회는 시민권을 획득한 프랑스 망명객들에게 10년 동안 선거권을 허락 하지 말고 무기 소지를 금하자는 페렝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 요구안을 지지하기 위해 500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5월 16일에 시위 집회를 가졌으며 이 시위를 마칠 때 다수의 시위대가 제네바 출신들의 지도자들로부터 식사를 제공받았다. 그날 밤 거리에서는 폭동이 일어났으며 시 장관 오베르가 누군가를 체포하려 하자 페렝이 자기 수하의 간부를 낚아채 갔다. 다음 날 조사가 진행되어 5월 23일에는 주동자 몇 명이 체포되었다. 다음날 소의회와 대의회는 페렝의 사건에 착수하였지만 그는 체포되기 전에 다른 세 명과 함께 도시를 빠져나갔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 중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들 중 세 명에게는 형이 집행되었으며 나머지는 망명했다. 베른 시의회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섰으며 부재중에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들 중 한 명인 [[프랑수아-다니엘 베르뗄리에르]] 제네바로 돌아왔는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9월 2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페렝 파의 종말을 초래했다.
1549년 1월 18일에 시의회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시 전체에 복음을 따라 [[칼뱅주의|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종교법을 지키도록 요구했다<ref>CO 13:158-60</ref>. 모든 사람에게 기독교적인 생활을 준수하며 교회 예배에 충실히 출석하라고 간곡히 권고했다.
규정 준수 여부를 감독하던 사람들은 임무를 책임감 있게 수행해야만 했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모범을 보이도록 요구되었다. 목사들의 직위 해제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신중히 처리하도록 했다. 포고문은 그 다음 예배 전에 공포되어야 했다.
 
칼뱅이 염려한 대로 1549년 2월에 아미 페렝은 수석 시 장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555년 2월에 거행된 선거는 칼뱅의 추종자들에게 완전한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 4명의 시 장관 모두 칼뱅을 지지하였으며 페렝의 추종자들인 제네바 출신들은 모든 정치 일선에서 영향력을 잃어 버렸다. 그 다음 달에 다수의 프랑스 망명객들(약 50명)이 제네바 시민권을 취득했다. 페렝 가문을 포함한 오랜 제네바 가문들은 많은 프랑스 망명객들이 자신들의 도시에 정착하는 것을 수용할 수 없음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1555년 5월 6일 시의회는 시민권을 획득한 프랑스 망명객들에게 10년 동안 선거권을 허락 하지 말고 무기 소지를 금하자는 페렝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 요구안을 지지하기 위해 500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5월 16일에 시위 집회를 가졌으며 이 시위를 마칠 때 다수의 시위대가 제네바 출신들의 지도자들로부터 식사를 제공받았다. 그날 밤 거리에서는 폭동이 일어났으며 시 장관 오베르가 누군가를 체포하려 하자 페렝이 자기 수하의 간부를 낚아채 갔다. 다음 날 조사가 진행되어 5월 23일에는 주동자 몇 명이 체포되었다. 다음날 소의회와 대의회는 페렝의 사건에 착수하였지만 그는 체포되기 전에 다른 세 명과 함께 도시를 빠져나갔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 중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들 중 세 명에게는 형이 집행되었으며 나머지는 망명했다. 베른 시의회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섰으며 부재중에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들 중 한 명인 [[프랑수아-다니엘 베르뗄리에르]] 제네바로 돌아왔는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9월 2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페렝 파의 종말을 초래했다.
 
1555년 5월에 페렝 파의 패배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로 칼뱅은 편지에 제네바의 상황들을 언급하는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이로써 제네바 도시와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목숨을 건 칼뱅의 기나긴 투쟁은 결국 칼뱅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제네바에서의 투쟁이 끝나자 칼뱅은 또한 주변국가의 교회 일에 좀 더 깊이 연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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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칼뱅은 제네바 시민권을 얻었다. 1559년 6월 5일 [[#제네바 아카데미]]가 개원할 때 그는 어느 정도 회복되어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했지만 1564년 초에 그의 좋지 않은 건강 탓에 그 활동 중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1564년]] 2월 2일에 [[에스겔서]]를에스겔서를 인용하며 칼뱅은 마지막 강의를 했고 2월 6일 마지막 설교를 했다. 4월 27일에 칼뱅은 시 장관들과 소의회의 의원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칼뱅이 자신들에게 오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칼뱅의 집으로 찾아 갔다. 칼뱅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여 담소를 나누었다. 칼뱅은 그들의 우정에 감사를 표했으며 비록 자신이 부족한 점이 있기는 했어도 하나님께 봉사하며 이 도시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자신의 결점을 참아 준 그들의 인내에 감사한다고 말하고 그가 실패한 일들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칼뱅은 그들에게 공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추구하라고 당부했다. 그런 후 개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다음날 자신을 대신할 사람으로 선택된 베자를 추천하면서 칼뱅은 목사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 후 칼뱅은 다수의 친구들과 주요 인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5월 2일에 마지막 이별의 짧은 편지를 보낸 연로한 [[기욤 파렐|파렐]]도 칼뱅을 방문했다. 5월 19일에 목사들이 그의 집에서 정기적인 주간 모임을 가졌을 때 칼뱅도 마지막으로 그들과 함께 했다.
 
[[1564년]] [[5월 27일]]에 그는 사망하였고 다음 날 매장되었다. 칼뱅은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고 숭배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그의 무덤조차 알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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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네바 아카데미 ==
[[파일:Façade nord du bâtiment sud du Collège Calvin 2006-08-16.jpg|섬네일| 스위스 제네바 대학]]
제네바 아카데미는 [[제네바 대학]]의 전신이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1559년 6월 5일 칼뱅을 의장으로 하여 [[생 피에르 교회]](St. Pierre Cathedral)에서 열린 집회를 통해 개교했다. 이미 칼뱅이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돌아온 직후인 [[1541년]]에 학교를 세울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1555년에 제네바에서의 정치적 상황들이 변할 때까지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대학설립을 위해 먼저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다. 1558년 초 부르드푸(Bourg-de-Four) 병원 근처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하지만 건축을 할 수 있는 정부의 재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칼뱅은 상당한 액수의 기부금을 모금하는 일을 관장했다.
 
대학설립을 위해 먼저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다. 1558년 초 [[부르드푸]](Bourg-de-Four) 병원 근처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하지만 건축을 할 수 있는 정부의 재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칼뱅은 상당한 액수의 기부금을 모금하는 일을 관장했다.
 
칼뱅과 다른 목사들은 교육 계획안을 만들었고 승인을 받기 위해 시의회에 제출했다. 새로운 대학에서 기존에 있던 라 리브 학교는 7학급의 사립초등학교가 되었다. 처음 두 학급에서는 아이들이 불어와 라틴어 쓰기 읽기를 배웠다. 그리고 다음 학급에서는 라틴어와 그리스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독해 영역과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로 표현하는 영역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수요일에는 수업이 없었다. 아침에 학생들은 교회에 갔으며, 오후에는 휴식 시간을 가졌다. 토요일에는 학습했던 내용을 복습했으며, 다가오는 주일을 위해 교리문답을 공부했다. 학습을 시작하는 날이 되면 교리문답에 있는 기도로 (특히 학교를 위해) 시작했다. 기도와 시편 찬송은 학습 시간표에 고정적으로 들어 있었다. 학생들은 또한 주기도문 암송과 사도신경, 그리고 십계명을 배웠다. 교사들은 목사들과 교수들에 지명되었으며, 시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사립초등학교에 출석하던 학생들은 시립중등학교(schola publica, académie)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는데, 이 학교는 그다지 보편적이지 않은 형태의 기관이었다. 등록한 학생은 제네바 신앙고백서에 서명하고 교사들과 같은 방식으로 임명된 5명의 교수가 가르치는 27개의 강의 과정을 수강하였다. [[히브리어]] 교수는 히브리어 주석을 이용한 구약성경 해석으로 학생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그리스어]] 교수는 그리스 철학자(특별히 윤리학이 주목을 받았다)와 시인의 글을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 인문학을 담당하던 교수들은 자연과학, 수학, 그리고 웅변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특히 마지막 과목은 목사나 변호사를 준비시킨다는 생각을 가지고 가르쳤다. 토요일 오후에는 실제적인 신학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몇몇 목사들의 지도 아래 학생들은 설교를 발표하고 평가를 받았다. 이미 언급한 교수들 외에도 성경해석을 위한 두 명의 교수가 있었다. 대학 초창기에는 칼뱅과 베자가 이 자리를 채웠다. 교수들은 금요일에 있던 목사회에도 참석했다. 포도 수확 철에는 3주간 방학했다.
 
사립초등학교에 출석하던 학생들은 시립중등학교(schola publica, académie)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는데, 이 학교는 그다지 보편적이지 않은 형태의 기관이었다. 등록한 학생은 제네바 신앙고백서에 서명하고 교사들과 같은 방식으로 임명된 5명의 교수가 가르치는 27개의 강의 과정을 수강하였다. [[히브리어]] 교수는 히브리어 주석을 이용한 구약성경 해석으로 학생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그리스어]] 교수는 그리스 철학자(특별히 윤리학이 주목을 받았다)와 시인의 글을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 인문학을 담당하던 교수들은 자연과학, 수학, 그리고 웅변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특히 마지막 과목은 목사나 변호사를 준비시킨다는 생각을 가지고 가르쳤다. 토요일 오후에는 실제적인 신학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몇몇 목사들의 지도 아래 학생들은 설교를 발표하고 평가를 받았다. 이미 언급한 교수들 외에도 성경해석을 위한 두 명의 교수가 있었다. 대학 초창기에는 칼뱅과 베자가 이 자리를 채웠다. 교수들은 금요일에 있던 목사회에도 참석했다. 포도 수확 철에는 3주간 방학했다.
1559년 6월 5일 [[생 피에르 교회]]에서 이 도시의 비서관 [[미셸 로제]](Michel Roset)가 대학의 규정들을 크게 낭독하고 교사들이 그 법률과 신앙고백서에 동의하기로 맹세한 뒤 목사들이 시의회에서 대학 학장으로 추대한 베자가 개막 연설을 했다.
 
1559년 6월 5일 생 피에르 교회에서 이 도시의 비서관 미셸 로제(Michel Roset)가 대학의 규정들을 크게 낭독하고 교사들이 그 법률과 신앙고백서에 동의하기로 맹세한 뒤 목사들이 시의회에서 대학 학장으로 추대한 베자가 개막 연설을 했다. 대학이 자리 잡은 건물은 1564년에 가서야 완공되었다. 이 때에는 약 1,500명의 학생들이 있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외국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신학이나 법률 중 한 과목을 공부할 수 있었다.
 
== 칼뱅과 세르베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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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뱅과 한국교회 ==
한국교회는 칼뱅의 전통에 서있는 [[장로교]]회가 가장 강한 나라이다. 초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거의 장로교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오늘날 한국 교회의 60% 이상이 [[장로교]] 교인이다. 신학교에 있어서도 [[장로교]] 교단 신학교를 비롯한 많은 대학들이 칼뱅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다. [[요한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사업회|요한 칼뱅 탄생 500주년 기념사업회]]는 칼뱅 50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 한국교회는 학문적 발전을 이루면서 [[대한민국에서의 칼빈 연구]]가들이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인 최초로 장 칼뱅에 대한 박사논문을 쓴 학자는 [[신복윤]] 박사였다. 이후에 여러 학자들이 프랑스([[이수영 (목사)|이수영]])와, 화란([[최윤배]], 안인섭), 미국([[김재성 (1955년)|김재성]]), 남아공([[안명준]])등이 장 칼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들은 한국의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세계칼빈학회]]와 [[세계개혁신학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09년 그의 탄생을 기념하여 여러 국가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요한칼빈탄생500주년기념사업회]] 주최로 학자들이 대규모 학술대회를 열었다.<ref>{{웹 인용|url=http://www.cts.tv/news/news_view.asp?page=3&PID=P368&DPID=83159&s_part=0&s_str=%EC%B9%BC%EB%B9%88&c_field=&c_period=#|제목=CTS 뉴스, "칼빈500주년 기념대회 기자회견", 기사입력: 2008-10-23|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32733/http://www.cts.tv/news/news_view.asp?page=3&PID=P368&DPID=83159&s_part=0&s_str=%EC%B9%BC%EB%B9%88&c_field=&c_period=#|보존날짜=2016-03-04|깨진링크=예|확인날짜=2018-11-0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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