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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기묘년]] 으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조야에서는 당시 일을 꺼리고 두려워하며 감히 꺼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문신으로서 처음 [[기묘사화|기묘명현]](己卯名賢)의 신원 복원을 개진하였는바 이는 감히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홀로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f>[[1519년]] (중종 14년) 기묘 명현 : [[조광조]]·[[김식]]·[[김정]]·기준·윤자임·[[한충 (조선)|한충]]은 귀양 같다가 사형 당하고, [[김구]]·[[박세희]]·[[박훈 (1484년)|박훈]]·[[홍언필]]·[[이자 (1480년)|이자]]·[[최산두]]·[[유인숙]]는 유배를 당하고, [[안당]]·[[이장곤]]·[[김안국]]·[[김정국]]·[[김세필]]·[[정광필]]·신명인 등은 사림을 두둔하다 파면을 당했다.</ref>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조선 중종|중종]]은 [[기묘사화|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폐기토록 지시한 ≪소학≫· ≪향약≫에 대해서만 철회토록 허락하였다.
 
[[1543년]](중종 38) 8월 그는 [[기묘사화|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 같은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어 하며, 연로하신 부모를 뵙는다고 청원하여 귀근(歸覲) 하였다. 겨울 12월 연로하신 부모 봉양의 걸양(乞養)을 청하여<ref>양친의 나이가 모두 칠십이오니 마지막의 봉양을 원하옵니다라고 하였다.</ref> 고향과 가까운 [[옥과면|옥과]]현감에 제수되고, 춘추관의 겸직은 그대로 띠었다.<ref>[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6] '묵죽도'에 새겨진 도덕문명정치의 꿈. 조선일보(2012.08.20)[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19/2012081901268.html].</ref> 이때 호남관찰사로 와 있던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와 더불어 학문을 닦고 글을 주고받으며 정이 매우 두터웠다.
 
[[1544년]](중종 39) 11월 [[조선 중종|중종]]이 승하하고, 그가 가르치던 세자가 [[조선 인종|인종1545년]]으로(인종 등극하여원년) 여름 정사로4월 [[성리학]]중국의 숭상과사신 [[현량과]]를장승헌(張承憲)이 복원하고,와서 [[기묘년]]에국상을 희생된조문하였는데 선비들인조정에서 [[조광조]]ㆍ[[김정]]ㆍ[[기준]]그를 등의제술관(製述官)으로 신원도부름에 복원하였다나아갔다.
 
[[1545년]](인종 원년) 여름 5월에 조정에서당시 제술관으로그가 부름에가르치던 드디어 나아갔다. 당시세자 [[조선 인종|인종]]이 새로 즉위하여, 내외가조정에서는 모두바야흐로 태평성대를 기대했으며기약하여 전국의 선비를 모으니, 모두 그에게 [[조선 인종|인종]]의 경연의 보도 책임을 맡기고자 하였다. 그 사이 [[조선 인종|인종]] 건강을 잃자정사로 그는[[성리학]] 의약에숭상과 함께[[현량과]]를 참여하기를 청한 바복원하고,약원에서 직책이[[기묘년]]에 아니라는희생된 이유로선비들인 거부당하자 그는 세상의 기미(幾微)가 반 사림적으로 펼쳐질 것으로 예상하고 부모 병환을 들어[[조광조]]ㆍ[[김정]]ㆍ[[기준]] 본래의등의 임소로신원도 돌아왔다복원하였다.
 
그 사이 [[조선 인종|인종]]이 건강을 잃자 그는 의약에 함께 참여하기를 청한 바,약원에서 직책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당하자 그는 세상의 기미(幾微)가 반 사림적으로 펼쳐질 것으로 예상하고 부모 병환을 들어 본래의 임소로 돌아왔다.
 
=== 사직과 은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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