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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창덕궁에서 명사(明使)를 향응하는 기회를 타서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계획이 어긋나자 [[김질 (1422년)|김질]](金礩)·[[정창손]](鄭昌孫) 등은 사태의 불리함을 보고 이를 밀고하였다. 세조는 곧 성삼문 등에게 참혹한 고문을 가했으나 모두 굴하지 않았으므로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작형(灼形 : 단근질) 등으로 형살(刑殺)되었다. 하위지도 참살되고, 유성원은 자기 집에서 자살하였다. 이들을 [[사육신]]이라 부르며, 이에 연루된 자로 [[권자신]](權自愼)·[[김문기]](金文起) 등 70여 명도 모두 처벌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이후 세조는 성삼문 등의밀로에사건에 상왕 단종도 관계하였다 하여 강봉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삼아강봉하고 군사 50명으로 호송케 하여 영월로 귀양 보내고보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를 추폐(追廢)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세조의 아우 금성대군도 순흥(順興)으로 귀양 보냈다.
 
[[파일:Stale of Gumseong Daegun.jpg|섬네일|[[금성단]] 안에 있는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