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라블레: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앱 iOS 앱 편집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앱 iOS 앱 편집
27번째 줄:
반교권주의자이자 성직자, 기독교인이자 어떤 이들에게는 자유 사상가로 여겨지면서 의사이자 쾌활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고있던 그의 인격의 여러 측면들은 가끔씩은 모순되게 보이기도 한다.
 
== 생애 ==
법률가이자 투렌의 부유한 지주인 앙투안 라블레의 아들로, 서프랑스의 [[시농]] 근교에서 출생. 1510년경에 프란체스코파·베네딕트파의 수도원에 들어가 [[고전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푸아티에]]에서 [[1527]]년에 법학학위를, [[몽펠리에]]에서 [[1530년]]에 의학학위를 취득하고 [[히포크라테스]]의 의서를 연구해 이름이 알려졌고, 1532년 리옹 시립 병원 [[의사]]가 되었다. 또한 [[그리스어]] 고전을 깊게 공부한 희랍주의자(hélleniste)이기도 했다. 신학, 법학, 의학, 고전학 등 다방면적인 학술적 배경과 유럽 곳곳을 여행한 경험은 라블레의 소설의 토대가 된다.
 
1532년 이후에, 작자 미상의 소설 《가르강튀아 대연대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쓰게 된 《팡타그뤼엘》이 인기를 끌자, 가르강튀아 대연대기와는 다른 《가르강튀아》를 펴내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알코프리바 나지에(Alcofribas Nasier)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였다. 1534년, 책이 금서가 되고 박해를 피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 1550년 프랑스로 복귀하게 되나 1553년 소식이 끊겼다. 이때 사망한 것이 최근 와서 확인되었다.
 
=== 반계몽주의의 대두 ===
1545년 9월 19일 라블레는 1546년 크리스티앵 베첼이 편집하고 자신의 본명을 명시한 제 3서의 출판을 왕에게 윤허받는다. 소르본의 신학자들은 이 작품을 이단이라고 규탄했는데 이 비난은 제 4서의 헌정사에서 언급된다. 1546년 12월 31일 이 소설은 앞선 두 작품들이 적힌 대학 금서목록에 합류했다.
 
== 작품 ==
=== 소설 ===
==== ≪팡타그뤼엘≫ ====
1532년에 출판된 ≪팡타그뤼엘≫은 탄생, 교육, 모험과 전쟁에서의 무훈으로 진행되는 기사 소설의 구조를 계승하여 제목과 제목과 같은 이름의 주인공의 삶을 익살스럽게 묘사한다. 가르강튀아와 바드베크의 아들인 이 거인은 가뭄의 시기에 세상에 나오게 되는데, 팡타그뤼엘이라는 이름은 가뭄날 그가 태어났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