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셸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저서: 이복 언니 → 아버지가 다른 언니로 수정
6번째 줄:
Wollstonecraft Shelley}}, <small>[[혼인성씨|혼전이름]]:</small>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llang|en|Mary Wollstonecraft Godwin}}), [[1797년]] [[8월 30일]] ~ [[1851년]] [[2월 1일]])는 [[영국]]의 [[소설가]]·[[연극|극작가]]·[[수필|수필가]]·[[전기 (문학)|전기 작가]]이자 [[기행문|여행 작가]]이다. 그는 또한 [[낭만주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남편 [[퍼시 비시 셸리]]의 작품을 편집하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정치철학|정치철학자]] [[윌리엄 고드윈]], 철학자이자 [[여성주의|여권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부부의 딸이다.
 
메리 고드윈은 고작 생후 11일에 모친을 여의었는데, 이후 이복압복 언니인 패니언니다른패니 임레이와 함께 부친의 손에서 자라났다. 메리가 네 살 때, 부친 윌리엄 고드윈은 그의 이웃 메리 제인 클레어몽과 결혼했다. 고드윈은 딸에게 자금·학술·교육 면에서 모든 자원을 아끼지 않고 지원해 그가 그의 [[자유주의]] 정치 이론에 동참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814년에 메리 고드윈은 부친의 정치적 추종자 중 한 사람, 나중에 남편이 되는 퍼시 비시 셸리와 연애하기 시작한다. 메리의 배다른 자매 클레어 클레어몽과 함께 이 둘은 프랑스로 떠나 유럽을 여행하게 되는데, 그들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메리는 퍼시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이 후 2년 동안, 그와 퍼시는 [[도편 추방]]과 계속된 자금난을 겪게 되고, 이 와중에 뱃속의 딸을 유산하였다. 퍼시 셸리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해리엇과 사별한 뒤, 이 둘은 1816년 말엽에 혼인하였다.
 
1816년, 부부는 [[조지 고든 바이런|바이런 경]]과 [[존 윌리엄 폴리도리]], 클레어 클레어몽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 근방에서 여름을 보낸 것으로 유명한데, 이곳에서 메리는 그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큰 틀을 구상하였다. 셸리 부부가 1818년에 영국을 떠나 자리잡은 이탈리아는, 그들의 아이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는 넷째 아이 퍼시 플로렌스를 낳기 전, 둘째와 셋째 아이를 잃은 곳이다. 1822년에 그의 남편은, [[라스페치아]] 근해에서 항해 중 폭풍을 만나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하여 익사하였다. 일 년 뒤 메리 셸리는 영국으로 돌아왔고, 이 때부터 그의 여생을 아들의 양육과 전문 작가로서의 활동에 헌신하며 보냈다. 그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십 년을 지루한 투병생활로 보냈는데, 그가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을 두고 사람들은 [[뇌종양]]이 원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