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헌명숙황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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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정보|이름=장헌명숙황후 유씨<br>章獻明肅皇后 劉氏|작위=황후|재위=1012년 ~ 1022년|작위2=황태후|후임자=[[폐후 곽씨 (북송)|폐후 곽씨]]|후임자2=[[자성광헌황후|자성광헌황후 조씨]]|그림=B Song Dynasty Empress of Zhenzong.JPG|재위2=1022년 ~ 1033년|배우자=[[북송 진종|진종(眞宗)]]|출생일=[[968년]]|사망일=[[1033년]]|전임자=[[장목황후|장목황후 곽씨]]|전임자2=[[명덕황후|명덕황후 이씨]]|능묘=영정릉(永定陵)}}
[[파일:B Song Dynasty Empress of Zhenzong.JPG|섬네일|장헌명숙황후]]
 
'''장헌명숙황후 유씨'''(章獻明肅皇后 劉氏, [[968년]] ~ [[1033년]])는 [[북송 진종]]의 황후로 이름은 유아(劉娥)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태후이며 [[고황후]], [[측천무후]]와 함께 중국의 3대 여주(女主)로 불린다.<ref name="지앙">지앙성난, 《중국을 뒤흔든 여인들》, 강성애 역, 시그마북스, 2009, p.189~p.190, {{ISBN|978898445330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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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후 시절 ===
[[997년]] 조항은 진종으로 즉위했고, 서른 살의 유아를 데려와 귀비로 삼고자 했지만 재상 이항(李沆)의 반대에 부딪혀 가장 품계가 낮은 미인(美人)으로 삼아야 했다.<ref name="지앙196">지앙성난, p.196</ref> 그러나 황후 곽씨를 비롯해 진종의 후궁들은 아무도 유아를 함부로 여기지 못했고 진종의 총애를 독점하는 그녀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ref name="지앙196"/> 진종은 고아인 유아에게 피붙이가 없는 것을 가엾게 여겨 공미에게 유씨 성을 주고 유아의 오라비로 삼게 했다.

[[1012년]] 황후 곽씨가 죽자 진종은 유아를 황후로 책봉하고 싶어했지만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수의(修儀)로 봉하는데 그쳤다.<ref name="z269">장유유, p.269</ref> 이후 다시 유아의 황후 책봉 문제를 거론했지만 유아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한림학사 이적(李迪) 등이 강하게 반대하여 진종은 황후의 자리를 비워둔 채 유아를 덕비(德妃)로 진봉시켰다.<ref name="z269" /> 유아는 대신들의 반발을 누르고 황후가 되기 위해 자신의 궁녀인 이씨(훗날의 [[장의황후]])를 진종과 동침하게 했고, 이씨가 아들 조정(훗날의 [[북송 인종|인종]])을 낳자 아이를 데려왔다.<ref name="z270">장유유, p.270</ref> 진종은 조정을 유아의 아들로 선포하고 유아를 황후로 봉했다. 황후가 된 유아는 본격적으로 정사에 관여했고 진종은 이를 크게 개의치 않았을 뿐더러 그녀와 정사를 자주 논의하며 의지했다.<ref>장유유, p.271</ref> 상소문을 줄줄 외울 만큼 기억력이 뛰어났던 유아는 30여년간 진종과 함께 하며 그의 정치적 견해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터라 점차 국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ref>지앙성난, p.202</ref>

[[1020년]] 진종이 병에 걸리자 유아가 직접 국사를 처리하기 시작했고, 이전 유아의 황후 책봉을 반대했던 이적과 구준(寇準)을 비롯해 황후를 반대하는 세력과 지지하는 세력이 정쟁을 거듭하게 되었다.<ref>장유유, p.273</ref> 유아는 구준이 자신의 심복인 정위(丁謂)를 파면시키고 황후 반대파인 양억을 그 자리에 앉히려 한다는 것을 알고 구준을 파면시켰고, 또다른 반대파인 환관 주회정(周懷政)을 참수시켰다.<ref name="z270" /> 그 결과 정위는 재상이 되었는데 그가 황후 반대파인 또다른 재상 이적을 제쳐두고 독단으로 결정을 내리자 이적은 진종을 찾아가 둘 중 한 사람은 조정을 떠나야 한다고 간했고, 이 이야기를 엿들은 유아는 이적을 파면시켰다.<ref>장유유, p.273</ref>
 
=== 황태후 시절 ===
2년 뒤인 [[1022년]] 진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이 인종으로 즉위했고 유아는 진종의 유언에 따라 황태후로서 섭정을 하게 되었다. 대신들은 유아에게 응원숭덕인수자성태후(應元崇德仁壽慈聖太后)라는 존호를 올렸고, 태후의 생일인 장녕절(長寧節)을 황제의 생일인 건원절(乾元節)에 필적하게 성대히 치렀다.<ref name="z275">장유유, p.275~p.276</ref> 권력을 손에 쥔 유아는 사사건건 자신과 대립했던 구준과 이적을 좌천시켰고<ref name="z275"/> 심복 정위가 뇌윤공과 결탁해 권세를 휘두르려 하자 뇌윤공을 처형시키고 정위를 유배시켰다.<ref>지앙성난, p.207</ref> 정위 외에도 [[왕흠약]], [[임특]], [[진팽년]], [[유승규]] 등 오귀(五鬼)로 불리며 진종의 총애를 받던 대신들을 숙청하고 [[왕증]], [[여이간]], [[노종도]], [[장지백]]과 같은 명신을 기용했다.<ref>지앙성난, p.208</ref> 진종 후기에는 도교 사원의 건축과 제사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여 재정난을 겪고 있었는데 출신이 비천했던 유아는 하층민들의 고충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ref>지앙성난, p.209</ref>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도교 사원의 건축과 불필요한 노역을 금지시켰다.<ref name="지앙210">지앙성난, p.210</ref> 또한 도교 사원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고 사원에 바치는 공물도 금지하였으며 세금을 감면시켜주는 등 선정을 펼쳤다.<ref name="지앙210"/> 그러나 유아의 권력이 워낙에 막강했기 때문에 대신들은 그녀가 [[측천무후]]의 전례를 밟아 황제로 즉위할 것을 두려워했다.<ref>장유유, p.281</ref> 유아에게서 무측천이 어떤 인물이냐는 질문을 들은 노종도는 일부러 당대의 죄인이라고 대답했고, 유아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포기했다.<ref>장유유, p.283</ref> 인종은 유아의 친아들이 아니었지만 유아는 생전 인종의 출생의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고 애썼으며, 인종의 교육과 식사에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특히 《[[효경]]》을 강조하는 등 자신과 인종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고 노력했다.<ref name="z280">장유유, p.280</ref>

[[1032년]] 인종의 생모인 이씨가 죽자 유아는 서둘러 그녀의 장례를 궁인의 예로 치르려 하였으나 재상 여이간의 반대에 부딪혀 이씨의 시신에 황후의 옷을 입히고 수은으로 봉해 주었다.<ref name="z280" /> 시신을 궁밖으로 내갈 때에도 여이간이 서화문으로 나가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유아는 황태후의 장례와 동격이니 안 된다고 거절하였지만 환관 나숭훈의 설득으로 결국 이씨의 장례를 성대히 치러 주었다.<ref>청휘, 장허성, 《중국을 말한다 11》, 이원길 역, 신원문화사, 2008, p.122, {{ISBN|9788935914500}}</ref> 이듬해인

[[1033년]] [[3월 29일]] 유아는 65세로 세상을 떠났고 인종은 측천무후가 네 자의 시호를 가졌던 것에 따라 장헌명숙(章獻明肅)의 시호를 바쳤다.<ref name="지앙220">지앙성난, p.220</ref> 이로써 유아는 이전의 태후들의 시호가 두 글자였던 데에 반해 처음으로 네 글자의 시호를 쓴 태후가 되었고,<ref name="z285">장유유, p.285</ref> 이후로도 수렴청정을 한 태후는 네 자의 시호를 가지게 되었다.<ref name="지앙220" />
 
=== 사후 ===